나는 가끔씩 고즈넉한 깊은 밤에 일을 하곤 한다.    
낮 동안의 소요와 소음들이 잦아들고 모두가 잠든, 오롯한 나만의 시간으로 자신과 마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때 살며시 찾아와 내 무릎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편안해 하는 존재가 있었다.  고요한 그 시간에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였다.  
 
아무 말도 필요 없이 그냥 그렇게 조용히 서로를 쓰다듬고 기대면 되었다. 
 
쮸쮸가 우리 집으로 들어 온지도 벌써 6년이다.   
어느 날 남편이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들고 들어왔다.  
“웬 고양이야?” 라며 펄쩍 뛰는 나에게 어느 고객의 집에서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많이 낳았는데 주인이 모두 기를 수가 없어서 버린다고 하길래 불쌍해서 가져왔다며 우리가 길러 보자는 것이었다. 
고양이라면 괴기 영화에서 귀신이 나올까 봐 잔뜩 긴장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야옹” 하며 튀어 나오곤 하는 요물 같은 동물로만 여기고 있던 나였다.
갑자기 그런 짐승을 기르라고 하니 대책이 서질 않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너무 부드럽고 연해서 꽉 쥘 수조차 없는 여리디 여린 고양이었지만 안 좋은 선입견 때문에 도저히 기를 맘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같이 살고 있던 조카에게 윗집 사는 봅이 최근에 개가 죽어서 쓸쓸할 테니 갖다 주라고 하였다.
 
“이모, 봅이 자기는 개가 죽은 후 당분간 동물은 안 키운데요.” 
 
그리고 고양이는 기르기가 쉬우니 한번 길러 보래요, 하면서 다시 데리고 왔다.    
아무리 싫어하는 짐승이라 할지라도 어린 생명을 그대로 버릴 수는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키우기 시작하였다. 
“고양이가 이뻐요? 고양이 좋아해요?” 
친구들이 집에 와서 고양이가 있는 것을 보면 묻곤 했다.  
그러면 “으응 ~~ 뭐 남편이 가져온 거라 할 수 없이 키워.”  
이런 식으로 말하던 내가 어느새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쮸쮸가 어릴 적 어느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부부 모임이 있는데 그 시간에 하필이면 고양이가 크리스마스 트리에 올라가  반짝이는 전등 사이로 얼굴을 쏙 내밀며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쮸쮸 모습을 보고 모두들 너무 귀엽다고 칭찬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지며 우리 고양이의 자랑을 시작 하였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쮸쮸에게 너무도 큰 시련의 시간들이 왔다.     
집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작하면서 많은 짐들이 버려지고 가구들이 자리를 옮기고 하는 수라장 속에서 자신의 쉴 공간을 잃어버린 고양이가 당했을 불안을 전혀 생각 치 못한 것이다.  
나 역시 정신없이 일에만 몰두하다보니 쮸쮸를 어디 한군데서 편히 쉬게 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수리 후 쮸쮸가 조금 정착 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이사를 하게 되었다.    
고양이 바스켓을 준비해 두었는데 이삿짐 아저씨와 남편이 엉뚱한 짐을 넣고는 막상 고양이는 박스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 넣어  버렸다. 
안 된다고 말렸지만 바쁜 이사 날 길게 이야기 할 형편이 아니었다.
 
새 집으로 이사하여 짐을 대충 풀고 나니 어느새 어두워졌다.  
7월의 겨울은 춥고 해도 짧다.  
저녁을 먹은 후 잠시 쉬는 시간에 고양이가 안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쮸쮸 어디갔어?” .. “어디다 두었어? 그 박스는?”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이고 야단났다. 그 박스가 공장 팔렛에 얹혀 있나 보다” 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철렁하면서 쮸쮸가 하루 종일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시고 이제는 두꺼운 랩으로 둘러 싸여 짐들과 함께 어두운 공장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하니 숨이 막혔다.
아마도 죽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는 급히 공장으로 달려갔다. 
“쮸쮸, 쮸쮸!” 하고 내가 큰소리로 불러도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어머나! 죽은 건가? 불길한 생각이 드는 순간 어디선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야오 옹~~” 야오 옹~” 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죽은 자식이 돌아온 것처럼 반가웠다.
 “여보 저기야! 빨리! 저 짐들을 내려욧!” 
그렇게 우리는 쮸쮸를 죽게 했다가 겨우 찾았다.  
얼마나 쇼크였을까?  “미안해 쮸쮸, 이젠 괜찮아.” 하면서 고양이를 안고 집으로 왔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우리 쮸쮸는 변해 버렸다.  
내가 오라면 얼른 와서 얼굴을 비비며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조심조심 눈치를 본다.  
이렇게 오라고 하는 것이 진짠지 아님 또 자기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가늠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후  또 한 번의 집 공사가 있었는데 쮸쮸는 스스로 집을 나가 자신의 거처를 찾아서 두 달 이상을 험한 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속으로 다행이다. 공사 기간 동안 또 쉴 곳이 없어서 내심 걱정 했는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주니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고마웠다.   
너무 영리한 짐승이라 공사가 끝나니 집 문 앞에 와서 기웃거리며 집안을 들여 다 본다. 
자기가  살던 공간이 완전 다른 모양으로 변했지만 안방 침대 밑에 자신의 거처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지 자꾸 안을 쳐다본다.   
불쌍한 맘이 가득했다. 어떻게라도 들어오게 해서 따뜻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주고 싶건만  불러도 쉽게 오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집 주위에서 배회하며 기웃거리니 안타까움만 솟아났다.  
변해 버린 쮸쮸의 모습, 그 예쁘고 우아하던 걸음걸이와 자태는 사라지고 의심의 눈초리와 말라버린 모습 그리고 윤기 잃은 털.  
이 모든 것이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리라   
그러나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결심을 한 듯 쮸쮸는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제 모습을 회복하고 한동안 살았다.
하지만 야생을 경험했던 탓인지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어 울어대니 가끔씩은 내 보내야 한다. 
며칠 전, “쮸쮸, 나갔다 들어와, 제 때 들어 와야 해” 하면서 내 보낸 고양이가 들어오지를 않았다.  
이름을 부르면 어딘가에서 “야옹” 하는 소리는 가늘게 들리는데 찾을 수가 없더니 어찌된 일인지 이웃집  지붕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      
먹이를 주며 겨우 내려오게 한 뒤부터 아예 집에 들어 올 생각을 않는다.  
그렇다고 멀리 도망을 가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를 통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들의 깊은 사랑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자녀들과 특히 가출한 자녀를 둔 부모들의  아픈 마음이 충분히 상상이 된다.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줄 수 있음에도 자식들은 부모들을 믿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다가 험한 일을 겪곤 한다.  
또 의도하지 않았던 일로 신뢰를 잃어버리는  관계는 얼마나 많은가? 
나의 잘못으로 사랑하는 쮸쮸에게서 의심을 받고 이제는 아예 집을 나가 살고 있는 쮸쮸를 볼 때마다 너무나 안타깝다.  
하지만 이제는 성인이 되어 추위와 배고픔, 강자의 공격이 도사리고 있는 험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자유를 더 찾고 싶어 하는 쮸쮸의 의지를 존중해 주고 싶다.  
 
밤마다 쮸쮸가 와서 자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없으면 건강하게 자유를 만끽하며 하고 싶은대로, 살고 싶은대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별 아닌 이별을 했다. 
 
오혜영(글무늬 문학사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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