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늙음은 나를 찾아온다. 
늙고 싶어서 늙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프다.
주름진 얼굴, 젊은 날의 패기가 사라져 자신이 초라하다는 자격지심이들 때, 젊은이가 폄하하고 무시하는 듯 한 태도를 보일 때면 더욱 위축되고 서글퍼진다.
‘나는 젊어 봤다. 너는 늙어봤냐?’
세간에 떠도는 말을 뇌까려 보아도 위로가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늙음을 체념 한다면 오히려 발전 없는 늙은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체통이라도 지켜야 될 텐데 체통이란 그냥 갖추어 지는 것이 아닌 것. 
특히 갖추지도 못한 체통을 지킨다고 별나게 군다면 분명 늙은이의 고집불통으로만 비쳐질 것이다. 
 
매달 첫 번째 토요일 문학회에 가기위해서 회원들과 만나는 주차장 근처에 있는 한 cafe에서 
아침 대용으로 빵과 coffee를 시켜 놓고서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할머니 한분이 앉아 계셨다.
“할머니 이거 한번 드셔 보실래요?” 하였더니 “늙은이가 체통을 지켜야지!” 하고 쏘아 붙인다.
잠시 머리가 혼란하였다. 한적한 아침, 아침 인사 겸 따뜻함을 담아 건넨 호의였는데...
보기에도 힘든 삶을 살아온 것 같아 보이는데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쌀쌀한 모습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참으로 곱게 늙으셨어요” 노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말을 듣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 듣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내키는 대로 멋대로 살아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닐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는 허리가 굽은 꼬부랑 할머니들이 많았다.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분들도 흔했다. 
요새는 환경이 많이 좋아져 머리에 물 항아리며 무거운 것들을 이고 다니지 않고 땡볕에서 논, 밭일을 하지 않아서 인지 그런 분들을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햇빛에 노출되고 노동을 하며 많은 고생을 하면 훨씬 더 늙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젊어서 많은 고생을 하신 분들은 다 그럴까?
그것은 분명 아니다.
아무리 똑같은 어려움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었느냐 에 따라 표정이 몸에 나타나는 것이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즐겁게 넘자.
그것이 오히려 몸과 마음을 더욱 젊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역경을 넘었다고 해도 어떤 분은 나이보다 더욱 늙게 보이고 어떤 분은 오히려 젊게 보이기도 한다.
결국은 모두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아무리 쓰디쓴 약이라도 섭취하면서 몸에 좋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마신다면 분명 약이 될 것이다.
그런 믿음들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긍정의 눈으로 끊임없이 느끼고, 스스로 체득하여 강철처럼 강한 믿음을 갖을지어다. 
역경의 시기를 너무 마음에 두지 말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지어다 
자신의 능력이상을 가지려 욕심내기보다는 지금의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려 노력한다면, 기왕이면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아간다면,
나이가 들어가도 멋지게 보일 것이다.
 
나에게는 노모가 계시다. 워낙 철저한 분이시다.
빈틈없이 사셔서인지 참으로 건강 하시다.
그러나 퇴행성관절염 때문에 잘 걷지 못하신다. 
휠체어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더니 그도 아니라고 만류 하셨다. 
자식들 키우느라 자신의 몸은 돌보시지 않고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사셨다. 
이젠 늙으셔서 자식들의 도움을 받으셔야 하건만 
“내가 이제까지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하며 자존심을 지키신다. 
그것이 과연 자존심을 지키는 것일까?
나의 이런 생각이 오히려 그 분의 고매한 인격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지.
아닐 것이다. 그분의 거절 이유는 자식 사랑 때문일 것이다.
이젠 같이 늙어가는 자식들이건만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끼시면서 그저 주기만 생각하신다.
나도 그분의 피를 물려받았고, 그 체념의 DNA를 받았을 테니 그렇게 살아가야지.
비록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청춘으로, 생각을 젊게 하며 밝고 환하게 살아갈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분명 나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임보형(글무늬 문학사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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