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 영웅인가?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다 한 마을에 들렀을 때, 동구 밖에 앉아있던 노인에게 물었다.
 
여행객 : “이 마을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태어난 적이 있습니까?”
 
노인 : (뜨악한 표정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며) “아니오. 이 지역에선 아기들만 태어났습니다.”
 
우문현답이라 할까? 넌센스게임 이라고 할까? 분위기도 파악도 못한 한 과객의 흰소리일까?  
 
아무래도 좋다. 여기에 리더십의 중요한 힌트가 있다. 사람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이지, 처음부터 리더로 만들어져 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리더십의 DNA에 대한 개인차는 약간 있을지언정, 그것이 ‘태생 리더십’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훈련으로, 학습으로 경험으로 리더십의 자질이 배양되는 후천적인 요소가 많은 게 이제까지의 증명이다.   
 
그럼에도 한국적 리더십의 고전은 “개천에 용 났다”는 말처럼 태생적인 요인을 더 강조하고 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과거 발행된 한국의 위인전이나 영웅전은 썩 훌륭하게 기록되지 못했다. 어느 책을 펼쳐도 주인공의 미화는 끝이 없다. 태몽부터 보통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성정(性情)을 갖췄다고 한다. 이들의 태몽엔 호랑이, 태양, 용이 등장하는 것은 기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리더의 조건을 다 갖췄다고 한다. 자랄 때에 행동하는 것,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생후 몇달 안되어 벌써 어른스럽게 행동한다. 성장과정에 당연히 있어야 할 철부지 행동을 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10대 소년 시절, 부모의 중병을 치유하기 위해 손가락에서 피를 뽑아 입속으로 수혈시켜 낫게 했다는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 수두룩하다. 고기가 먹고 싶다는 병환 중 부모의 한숨을 듣고 방법이 없자, 허벅지 살을 베어 삶아 드렸더니 깨끗이 나았다는 엽기적인 잔인성이 ‘효도’란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닫는 비범성도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언급된다. 국가의 위기 앞에는 20대 30대의 젊은 나이에 전혀 갈등조차 하지 않고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다. 보통 사람이 겪는 아픔과 갈등, 좌절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한국적 영웅’들은 이미 ‘태생 영웅’이다. 그렇게 태어나서 영웅이 안되면 오히려 기적 중에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들의 능력은 외경심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명백한 결점인데도 외경스럽게 포장되어 지고지순한 이미지만 간직하게 한다. 백화점의 마네킹처럼 도열한 이런 위인전에서 생명력이나 공감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솔직담백한 리더
오래 전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한 재시 잭슨 목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해 사람들을 감동시킨 바 있다. 
 
“나의 경쟁자 듀카키스의 양친은 의사와 교사였고, 나의 부모는 하인이었고 미용사였으며 경비원이었습니다. 듀카키스는 법률을, 나는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종교와 인종의 차이, 경험과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란 나라의 진수는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듀카키스의 선친은 이민선을 타고 미국에 왔고, 나의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앞 세대가 무슨 배를 타고 미국에 왔든지 간에 그와 나는 지금 같은 배를 함께 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 가지 실, 한 가지 색깔, 한 가지 천으로 만든 이불이 아니라 누비이불을 만들어야 합니다. 나의 유년 시절 어머니께선 털 헝겊, 실크, 방수천, 부대자루 등 그저 구두나 간신히 닦아낼 수 있는 조각천들을 모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힘찬 손놀림과 튼튼한 끈으로 조각천들을 꿰매어 훌륭한 누비이불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힘과 아름다움과 교양을 상징합니다. 이제 우리도 이른바 ‘누비이불’을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비이불 리더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훌륭한 목수는 버리는 나무가 없고, 훌륭한 줍는 버리는 헝겊이 없듯, 훌륭한 리더는 버리는 사람, 버리는 과거가 없다. 리더가 나이 들어가면서 ‘꼰대’ 소리 듣지 않으려면 과거에 머물러 살지 않는 게 중요하다. 자신과 타인, 팔로워에 대한 평가는 특히 그렇다. 
 
“그 친구 내가 부장할 때 복사하고 있었어” “그 친구, 취직 못해 빌빌 거릴 때 내가 인터뷰해서 뽑아 줬어”
 
“걔? 아직 애지 뭐. 밥이나 먹고 사는지 모르겠네.” “걔가 뭘 잘 몰라서 그래.”
 
과거 경력이 화려(?)하지만, 현재 ‘별 볼일 없는 시간’을 보내는 사람,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은 ‘푼수’들이 자주 내뱉는 이런 말을 리더라면 차마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참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후배가 따져 보면 이미 내가 팀장, 부장하며, 다이내믹하게 활동하는 것을 직간접으로 듣고 새삼 깨닫고 놀란다. 나이 뿐 아니라 능력도, 실적도 컴퓨터 다루는 실력도 그때 나보다, 아니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낫다. 그런데도 그 사람에 대한 오래 전 기억이 현실까지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의 ‘얼라들’
부침(浮沈)이 빠른 정치권 근처에 있다 보면 그런 일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해 국정감사 자리에서 소위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는 청와대의 비서관들을 ‘청와대 얼라들’이라고 표현했다. 한쪽에서는 속시원하다며 환호했지만 당사자들의 ‘소태 씹는 맛’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내가 얼라들하고 일한단 말인가?”하며 진노했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그가 앞뒤를 잘 가리며 언어에 ‘절제의 미’를 더했다면, 얼마든지 ‘다른 세련된 표현’으로 되칠 수 있을 터인데 투박한 언어의 공격은 상대의 ‘도포 자락’도 못 잘랐다. 그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비서실장을 할 때 30대였던 ‘얼라들’은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뒤 대통령의 소통 길목을 지키는 ‘휴대폰 권력’이 돼 있었다. 공개석상에서 90도로 머리를 숙이고, 거의 매일 면전에서 ‘친박’의원들의 비난을 듣는 수모를 겪은 끝에 5개월만에 물러난 그는 결국 ‘얼라들’에게 호되게 반격을 당하고 차기 공천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비서실장으로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가 여당 원내대표가 돼 '자기정치'를 하는 걸 보고 괘씸함을 넘어 배신감을 느꼈을 터이다. 하지만 그도 10년 전 비서실장 할 때 봤던 그 ‘얼라’가 아니라는 걸 소위 ‘유승민 파동’을 통해 명확해졌다. 
 
정치권에 오래 머물렀거나 관찰했던 사람들은 김무성 대표가 30년 전 처음 정치에 입문해 상도동 김영삼 총재의 집을 드나들 당시를 기억한다. 그에게 붙은 ‘무대’라는 별명은 지금 흔히 말하는 것처럼 ‘김무성 대장’의 뜻이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새파란 30대 초반 ‘얼라’로 손님들 신발정리 같은 허드렛일도 마다 않던 그를 귀엽게 봐서 수호지에 등장하는 ‘어리버리한’ 무대를 빗대 애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그냥  ‘무대뽀’가 줄어 ‘무대’가 됐다는 이설도 존재한다). 여하튼 그때의 ‘무대’로만 판단해서는 오늘의 집권여당 대표로 지지율 20% 안팎을 오가며, 여당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가진 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김한길 새정치민주연합 전 대표 비서실장을 지낸 노웅래 의원은 김 대표와 박 대통령 간의 현안 조율을 위해 당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한테 연락했다가 “내가 당신 아버지(고 노승환 전 국회부의장)랑 같이 정치하던 사람이야”라는 농반진반 말을 들었다. “그건 아버님하고 일이고요”라고 되받았지만, 자신을 아이 취급하는 상대방하고 대화가 잘 됐을 리는 없다. 김 전 비서실장은 그 뒤부터는 정무수석을 통해 연락을 하며, 상대하기엔 ‘격이 안맞다’는 걸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 결과 그의 재임 내내 ‘소통부재’의 대통령 리더십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조직 내부가 됐건 외부가 됐건 함께 일을 해나가야 할 사람들을 '아이'로 봐서는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존중, 편하게, 부드럽게
짐 콜린스의 ‘5단계 리더십’ 구분에 따르면 목표의식이 분명하고 정력적으로 일하는 지도자는 ‘유능한 리더’까지는 될 수 있다. 하지만 조직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리더’가 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과신하고 구성원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이’는 잊어버리고, 그 ‘얼라’를 존중하며, 뒷사람들의 생각과 비전을 인정해주는 것, ‘자기 정치’도 하게 만들어 주는 게 위대한 리더십의 출발이다. 흔히 “나이 들어 대우 받으려면 후배들 한데 잘해주라”는 말이 빈말이 결코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실제로는 거꾸로 가는 경우가 더 많다. 
 
팔로워들을 자기 앞에 줄 세우고, 때론 누군가를 ‘제압’함으로써 권위를 세우고 싶은 유혹이 더 커지는 모양이다. 거창하게 멀리 볼 것도 없이 조그만 부서나 회사, 심지어 교회도 다 그런 듯하다. 
 
송기태 (논설위원/채스우드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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