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계속되는 무더위에 갇힌 무료함이 책으로 안내한다. 무엇을 읽을까 살피던 나의 시선이 <은행나무 아래로 오는 사람(박경자 저))>이라는 책에 꽂힌다. 책갈피에 끼어있는  ‘쾌유를 빕니다’라는 낯 익은 필체가 아련한 그리움이 되어 가슴 한 가운데로 스며든다.

아버지는 뿌리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여덟 살 철부지인 나를 무릎 꿇려 앉혀놓고 "너는 전주 이씨 임원군파 팔대조 자손으로....."하며 가르치셨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을 한자로 써서 액자에 걸어 놓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 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6.25 전쟁 중 남쪽으로 피난을 와 인천에서 여고 시절을 보내며 또래들과 함께 YWCA에서 봉사활동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전쟁의 회오리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뒤라 모든 것이 궁핍했지만 지도교사의 헌신적인 물질과 시간 지원으로 학생들의 야간 공부 지도와 거리 청소 등에 열심을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오류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제자리를 찾아 서게 되는 것이련만 그때 우리는 짧은 안목과 지식을 가지고 겁 없이 떠들어 댔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대학의 과정을 거쳐 제각기 직장을 갖고 여러 도시에서 제 몫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즈음 같이 봉사 활동을 하던 남학생으로부터 소포가 왔다.
소포 속에는 서간체 형식으로 쓴 일기장 두 권과 함께 ‘소심한 내 성격 탓에 이런 방법으로 밖에 내 마음을 보일 수가 없구나’로 시작되는 편지 한 장도 있었다.
드러냄 없이 조용히 뒤에서 궂은일을 다 맡아 하던 그 친구에게 솔직히 나도 마음이 가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마음의 물줄기를 서로에게 흘려 보냈고 내 마음은 늘 그 친구에게 가 있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그 친구와 같이 아버지를 찾아 뵈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친구와 너는 기독교인데 부모님이 불교이시면 한 가정에서 두 종교가 싸우게 된다. 너희들 의견은 존중하지만 종교적인 이견이 생길 때마다 부모님을 설득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하며 자리에서 일어 나신다.
무릎을 꿇고 있던 그 친구는 일어서질 못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나는 아픈 마음을 접었다.

대학에서 특수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그는 수원 외곽에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임시 건물을 짓고 교도소에서 출소해 갈 곳 없는 청년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심한 마음 앓이를 극복하고 2년 뒤에 교회에서 만난 청년과 결혼을 했다.
시모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고아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시모님을 도와 120여명의 아이들을 생활 지침에 따라 빈틈없이 돌봐야 했기에 삶이 고달팠다.
첫아들이 3살쯤 되었을 때 시모님께서 가나안 농군학교를 다녀오라고 하신다.
당신께선 벌써 다녀 오셨는데 갔다 오면 마음가짐이 달라질거라 하시며..

작열하는 태양 아래 아스팔트가 녹을 듯이 더운 7월에 회색 빛 새마을 단복으로 갈아입고 가나안 농군학교에 입소했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과가 진행되어 군대에 입소한 것 같이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시간에 일어나 예배를 드리고 밭에 나가 풀을 뽑고 채소 밭에 물을 주고 개인 명상의 시간이나 강의를 듣는 시간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예정된 날들이 다 지나고 퇴소 준비를 서두르는데 누가 방문을 노크한다.
문을 여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앞에 함께 무릎을 꿇었던 그 친구였다. 몸은 야위었지만 더 단단해 보이고 여전히 선량한 눈빛의 수줍은 얼굴로 "첫날부터 알아 봤지만 아는 체 할 용기가 없었어" 한다. 결혼 했냐는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네가 자리했던 내 마음의 그 곳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줄 수 없어서.."하며 미소를 보인다.

구름에 달 가듯이 두 번의 강산이 변하고 내 나이 오십 고개에 들어서는 1990년 서울에서 회의를 마치고 오후 4시 10분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싣고 피곤에 지쳐 곧 잠이 들었다. 갑자기 굉음과 함께 기차 유리창이 깨지고 피가 흐르는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화물열차와 부산으로 내려가던 내가 탄 열차가 조치원 역 앞에서 정면 충돌하는 대형 사고가 났다.
얼마 후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때는 조치원 병원에 누워 있었다. 상태가 위중하여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되고 오랜 병원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휠체어를 타고 병원 뜰에서 파란 하늘의 솜털 구름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와서 어떤 분이 전해 달라고 했다며 서류봉투를 준다. 봉투 안에는 <은행나무 아래로 오는 사람>이라는 책과 함께 ‘쾌유를 빕니다’라는 쪽지가 갈피에 끼어있었다.

마음 속의 옛 그림자는 둥지를 튼 채 빗겨서지 않는다.
잊으려 할 때 더욱 더 새로워 지는 그림자, 굴곡이 심했던 삶의 골목골목을 거쳐오며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그 그림자는 때론 나를 흔들어 댔다.
그러나 황혼을 앞둔 이 시점에서 그 그림자는 시나브로 양지가 되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어준다.

이명주(글 무늬 사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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