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서울대 박동규 교수를 인터뷰했다. 그는 한국의 시성(詩聖)이라 할 만한 박목월 선생의 장남이다. 문학평론가인 그는 당시 KBS1 TV 골든타임에 배치된 ‘문화가 산책’을 진행하고 있었다. 부친의 유업이라 할 수 있는 시전문지 월간 <심상>지 사옥을 나오며 슬며시 한 마디 물었다. 
“요즘 뭐가 가장 힘듭니까?”

“뭐가 힘든 게 있겠습니까? 공부만 하면 되는 게 교수고, 서울대 교수가 굶어서 죽었다는 말 없지 않습니까? 자식 키우는 게 힘들지···”

의외였다. 내심 <심상>지를 꾸려가는 경제적인 어려움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마지막에 들릴락 말락 들려준 “자식 키우는 게 힘들지”와 그의 모습이 귀에 쟁쟁하고, 눈에 삼삼하다. ‘천하의 서울대’ 교수도 ‘자식 키우는 일’은 분명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임을 은연 중에 고백한 말이다. 

하긴 서울대 교수뿐 아니라 한때 천하를 쥐락펴락하든 인물들도 자식 앞에서는 왠지 작아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스라엘에 불세출의 영웅이자, 신약성서를 펴자마자 제일 첫 구절에 언급되는 두 인물 중에 하나인 다윗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는 메시야 족보의 중심인물일 뿐 아니라. “신의 마음에 꼭 든 사람”으로 평가받지만, 유독 자식들과의 관계에서는 낙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초전에 곤두박질
다윗의 일생에 가장 큰 전환점은 ‘밧세바와의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인생은 브레이크 없이 곤두박질하고 만다. 처절한 뉘우침으로 비록 죄에 대하여는 신에게 용서받지만, ‘옛 영화’를 결코 회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요즘 말로 그가 ‘초전에 박살’난 우발적인 사고는 결코 아니었다. 그 ‘불행의 씨앗’은 이미 오래 전부터 뿌려졌다. 그의 삶을 추적해 보면 ‘권력형 여성탈취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통일 이스라엘의 정식 왕으로 즉위하기 전, 유다만 통치한 7년 6개월 동안 헤브론에서 낳은 여섯 아들이 모두 어머니가 다를 정도였다. 통일왕국 왕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취하여 자녀들이 더욱 불어났다. 

그의 성적 취향은 신이 내린 왕의 금기사항을 철저히 위배한 것이다.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던 신은 마침내 ‘밧세바의 사건’으로 인내의 임계점에서 폭발하셨다. ‘제사장의 나라’ 총책임자로서, 거룩한 백성’의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 덕목을 헌신짝처럼 버린 그의 죄에 대한 벌은 참으로 가혹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 그에게 전달된 징계목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칼이 네 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리라”였다.  

그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토록 통렬하게 회개했지만, 이 심판은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이후 그의 가정에 ‘칼이 찾아들어’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대홍역을 치른다. 
가장 먼저 장남, 암논이 아주 치사한 계략을 써서 이복누이 다말을 성폭행했다. 삼류 드라마의 줄거리조차 되지 못할 추악한 근친상간이 ‘거룩한 백성’으로 세움 받은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왕가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사건의 내막을 샅샅이 알고도 심하게 화만 낼 뿐이었다, 아버지의 권위로 바른 교훈과 징계를 하지 않았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 앞에서 그가 행한 행동치고는 너무나 어설프고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솔직히 그는 아비로서 훈계와 징계를 할 만한 권위와 도덕성을 상실했다. 자녀는 부모의 훈계나 교육, 잔소리보다 뒷모습을 보고 배우기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자녀들에게 보여준 다윗의 모습은 ‘여성편력’으로서 자녀들이 동일한 범죄를 저질러도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처해진 것이다.
“아버지는 어땠습니까?”라고 반문할 때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아비, 그래서 자식을 꾸중할 자격조차 잃어버린 가련한 아비의 모습이 바로 ‘일그러진 영웅, 다윗’의 초상이다. 너무나 믿기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사건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아비의 모습이다. 우리가 다윗을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마키아벨리가 “올바른 모범을 보여주는 것은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주는 것보다 낫다”고 한 말을 곰삭여 볼 필요가 있다. 

형제의 난
아비로서 ‘계도권’을 상실한 다윗,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먼저 다윗의 차남이자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에게 놀라운 ‘학습효과’를 가져왔다. 어떤 죄를 저질러도 아비는 자식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학습했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압살롬은 또 ‘칼의 여행’을 향해 가속페달을 힘껏 밟기 시작했다. 경제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이나 사회심리학자 조나단 하이트가 피력한 것처럼, 사람들이 흔히 생각이나 이성에 따라 행동하기보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며, 생각이나 이성은 그 본능적 행동을 합리화 시키는 쪽으로 쓰기 마련이다. 아버지가 체증된 죄악을 교통정리해주지 않자 스스로 해결사가 되기로 나섰다. 형제간에 피의 복수를 공의와 정직으로 실현되어야 할 ‘죄의 척결’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과 합리화로 위안으로 삼으며. 

‘칼의 여행’ 가속페달을 밟은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그동안 벼려온 칼에 죄의 얼매가 농익어 떨어지지 시작했다. 압살롬이 누이를 성폭행한 이복 형 암논을 자신의 방법대로 척결하는 ‘형제의 난’이 일으켰다. 밧세바를 욕보이고, 그의 남편을 그토록 간교하게 죽이며 형성된 ‘죄악의 DNA’가 장남과 차남을 통하여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장남을 통하여 간통의 죄악이, 차남을 통하여 쾌락을 위해 완전범죄를 꿈꾸며 치밀하게 충성스런 부하를 죽였던 살인마적인 자신의 모습이 더욱 확대 재생산되어 간교해진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다윗은 전율했다.   

사실 압살롬은 왕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그는 이스라엘 전국을 통 털어 외모로 가장 칭찬 받는 ‘꽃미남’이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을 정도였다. 그에 관한 소식이라면 모든 것이 다 뉴스가 되고, 토픽이 될 정도로 ‘뉴스 메이커’였다. 심지어 이발한 그의 머리털 무게가 얼마라는 것까지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으니,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정도이다. 외모만 출중한 게 아니라 리더십도 대단했다. 다윗 역시 자신의 후계자로 압살롬을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가장 기대가 큰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 ‘잘난 아들’이 골육상쟁의 중심인물이 되고 말았다. 형을 죽인 압살롬은 외삼촌인 그술 나라 암미훌왕의 아들집으로 도망가 3년을 지냈다. 다윗은 이미 죽은 암논에 대한 슬픔은 잊었으나, 도망가서 얼굴을 볼 수 없는 압살롬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졌다. 

다윗왕국의 권력서열 제 2인자이자 다윗의 생질이기도 한 국방장관 요압이 다윗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지혜롭게 다윗의 허락을 얻어 압살롬을 고국으로 다시 데려왔다. 

소통부재의 부자관계
그러나 다윗은 또 다시 큰 실수를 저지른다. 다윗은 압살롬을 그리워하였지만, 막상 그가 돌아오자 진정으로 용서하며 화해하고 수용하지 못했다. 그는 마음을 풀고 압살롬을 용서한 듯 보였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아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장남을 죽인 것에 대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아들은 아버지가 용서한 것 같아, 죄송함과 설렘, 두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문전박대 당한 채 2년 동안이나 아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한 마디로 부왕의 무관심과 무시 속에 방치된 ‘비운의 왕자’였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관심하자, 아들은 멸시받고 있다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모멸감, 섭섭함, 깊은 소외감,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좌절감과 그로 인한 반항심이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담판을 내고 싶었다. 소통이 안되어 질식할 것 같았던 압살롬은 먼저 자신을 데려온 고종사촌 형 요압 장관에게 종을 보내어 중재역을 부탁했으나 상종도 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분노가 폭발했다. 다시 종에게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르는 극약처방을 했다. 그제야 반응이 왔고, 압살롬은 자기의 절망적인 상황을 알릴 수 있었다. 이런 파괴적인 방법으로라도 해야 관심을 가져준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좌절했다. 

“장관 형, 형이 아버님께 나를 어찌하여 그술에서 돌아오게 하셨는지 분명히 말씀 드려줘.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그곳에 있는 것이 내게 훨씬 나았을 것이야. 이제라도 나로 하여금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줘.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아. 정말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느껴져.” 

압살롬은 한 맺힌 절규를 쏟아놓고서야 비로소 요압의 주선으로 2년 만에 부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압살롬이 부왕, 다윗을 알현하여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자 다윗은 돌아온 아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 한 번의 만남으로 아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침투한 증오심이 풀어지지 않았다.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듯,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부자간에 서로 소통과 교제가 없었으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 수용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마음으로만 사랑하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던 그 아들의 마음속엔 결국 반역의 음모가 자라게 된 것이다. 

“나를 이처럼 멸시하고 무시해? 반드시 보복하고 말 것이야!”     
처음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 때, 세자가 될 큰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그가 왕위 계승을 하리라는 기대를 했다. 다윗도,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요압도 다윗의 그 마음을 알고 그의 귀환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압살롬이 막상 귀환해보니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세자로서의 대우는커녕 철저히 잊혀진 아들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전력까지 의식하고 보면, 반란 이외에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다윗은 아들을 가장 강력한 정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압살롬은 4년 동안 부왕을 겨눌 칼을 갈았다. 백성의 민심을 얻기 위해 참으로 많은 처세술을 익혔다. 그는 억울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마음을 얻어 민심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며, 왕위를 찬탈하고 정당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빈틈없이 준비한 그의 쿠데타는 마침내 실패하고, 다윗은 죽음보다 깊은 고통의 터널을 건너야 했다.

완전한 용서, 온전한 수용
다윗과 압살롬의 부자관계는 “문제아동이란 절대 없다. 있는 것은 문제 있는 부모뿐이다”라는 니일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왕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을 몇 년 만에 만났다면, 가장 먼저 ‘지은 죄’에 대한 명백한 징벌을 한 후에는 완전히 용서하고 온전히 수용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용서도 아니었고, 용서가 아닌 것도 아니었다. 기왕 아들을 불러들일 결정을 했다면, 그를 불러 야단도 치면서, 동시에 불쌍한 마음을 품어주어 뉘우치고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도 불어넣어 주어야 했다. “자녀에게 회초리를 들지 않으면 자녀가 부모에게 회초리를 든다”는 토머스 풀러의 말처럼, 그가 아들에게 분명한 징계와 용서를 하지 않은 결과 아들은 ‘왕자의 난’으로 아비에게 칼을 겨누었다.   
  
다윗은 소통의 문을 활짝 열어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직접, 솔직히, 부드럽게, 진심으로’ 서로가 잘못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소통부재로 오히려 아들에게 분노만 키워주었다. 부모는 자녀들이 어떤 문제든지 정직하게 내어놓고 대화하며 토론하고 의견을 구할 수 있는 소통의 창구를 열어두어야 한다. 그런 창구가 없으면 결국 자녀들은 부모를 떠나버리고, 부모는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 특히 자녀들이 어떠한 실수와 실패를 했을지라도 화를 내기 이전에, 먼저 적극적으로 경청하고, 온전하게 수용하고 이해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화를 내거나 윽박지르면 자녀들은 꾀를 내서 잠자코 입을 다문다. 다윗이 압살롬의 실수 앞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려 했다면, 또 자신의 지난날 허물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었다면, 정적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같은 부자간이 되었을 것이란 상상도 해본다. 

“참으로 자녀를 아는 아버지는 그야말로 현명한 사람이다.” -셰익스피어

송기태 (상담학박사, 채스우드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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