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척의 배
지금부터 100여 년 전,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그때까지 인류가 만든 ‘초호화’ ‘최고’ 등등의 수식어를 붙여도 조금도 명예에 손상이 가지 않을 명예를 타고난 여객선 한 척이 출항한지 5일 만에 빙산에 부딪혔다. 배 밑창에는 날카로운 빙산이 그은 일직선으로 90m 가량의 틈이 생겨 침몰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이 배 3층 객실에는 당대 최고의 부호들이 탑승하여 밤새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었다. 중층과 하층은 일반 승객들이 밤새 술과 돼지고기 파티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빙산에 충돌한지 2시간 40분만인 새벽 2시 20분에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2,208명의 승객 가운데 여자와 어린이와 돈 많은 부호들을 포함 695명을 간신히 구조선에 내려 보낸 후, 1,513명은 손 쓸 새도 없이 대서양 바다가 무덤이 되고 말았다. 이 배를 제작한 영국 화이트 스타 회사는 “세상이 가라앉을지라도 이 배만큼은 가라앉지 않는다”고 안정성을 호언장담할 정도로 당시 최고의 선박 제조기술과 설계가 동원됐었다. 그러나 그렇게 제작된 이 배는 출항한지 일주일도 안 돼 파선되고 말았다. 이 배는 가라앉으면서 구조 조명탄을 쏘았지만 주변에 있던 미국 여객선들은 배 위에서 하는 불꽃놀이로만 알고 모두 무관심한 상태로 방치하고 말았다. 그렇게 침몰한 배가 바로 타이타닉호이다.  

스웨덴 스톡홀름에는 바사호 박물관이 있다. 출항한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바다 속에 침몰했던 ‘바사호’라는 대형 군함 한척을 333년 만에 인양하여 전시한 박물관이다. 지금부터 4백여 년 전, 1628년 8월 10일, ‘북방의 사자왕’이라 불리는 구스타프 2세가 발트해 제해권을 차지하고자, 역시 당대 최고의 선박 기술자가 3년 만에 제조한 1,300톤급 군함이다. 그렇게 건조되어 처녀 출항하자마자 돌풍을 만나 수백 야드도 못가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선원 150명, 군인 300명과 함께 수장되었다가 원형 그대로 인양된 ‘비운의 군함’이 바사호이다. 

당대 최고의 기술과 인력이 동원된 이 배들도 빙산에 쫘-악 긁히는 순간, 그리고 갑작스런 돌풍에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해본 채  자연의 장벽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세 척의 배
그럼에도 인류의 역사는 항해의 역사와 더불어 발달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배를 통하여 지구 반대편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배를 통하여 탐험을 떠나기도 했다. 또 배를 통하여 무역이 이루어졌고, 배를 통하여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배와 관련된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가장 크게 바꾸어놓은 가장 중요한 ‘3척의 배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는, ‘메이플라워호’이다. 1620년 영국 국교회의 예배와 신조에 불만을 품은 퓨리턴(청교도)들이 부패한 영국교회를 떠나, 신앙의 순결과 자유를 찾아 떠난 102명의 청교도를 태운 180톤짜리 배이다. 이 배의 주인공들은 오늘날 세계를 경영한다고 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의 선조들이다.  

둘째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한 유대인 ‘죄수’ 바울을 로마 황제의 재판받도록 그와 호송관 또 다른 죄수 등 276명을 싣고 로마로 떠난 배이다. 이 배를 두고 20세기 세계적 역사가요 문명비평가인 토인비는 “사도 바울을 싣고 간 배는 바울 개인을 싣고 간 것이 아니라 구라파의 문명을 싣고 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셋째는, ‘노아의 방주’이다. 인류의 죄악과 부패를 한탄하시던 신께서 소위 ‘지구 물청소’를 하시며, ‘인류의 판갈이’를 하실 때 새 역사를 창조하게 된 배이다. 이 배에 대하여는 아직 성경과 기독교가 전해지지 않았던 중국, 갑골문자에서도 어떻게 그렇게도 절묘하게 표현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그들이 갑골문자, 배선(船)자가 바로 노아의 여덟 식구를 구원한 방주를 나타내고 있다. 즉 배선(船)자를 해제하면, 배(舟)에 여덟(八) 식구(口)가 탄 배이다.   

왜, 판갈이인가?
우리가 고기를 한참 구워먹다가 고기 찌꺼기가 불판이나 은박지에 많이 남아있으면, 당연히 판갈이를 한다. 마찬가지로 당시 지구에는 죄악에 새카맣게 타버린 ‘인간 찌꺼기’가 너무 많았다. 불판이나 은박지에 타다만 고기 찌꺼기들이 다른 고기를 태우거나 지저분하게 하지 않는가? 당시 지구에는 죄악에 타다만 정도가 아니었다. 완전히 새카맣게 타들어가면서 아직도 남아있는 불똥들이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신은 이 ‘찌꺼기 인간들’을 대청소하며 판갈이 해야 할 필요를 느끼셨다. 도무지 선하게 될 만한 가능성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인간들에게 남아있는 찌꺼기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신이 부어주신 은총과 축복을 먹고 마시며, 쾌락과 부패의 도구로, 죄악의 도구로 오용했다. 특히 혼인은 신께서 가장 귀하게 보시고, 인류에게 가장 먼저 허락해 주신 선물이고 축복이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 소중한 결혼을 신의 뜻과는 정반대로 외모로, 세상적인 기준으로, 쾌락을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신의 뜻에 맞지 않는 결혼은 지옥이며, 끊임없는 싸움의 시작이란 사실을 몰랐다.  

이들이 결혼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도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니까 외적인 ‘아름다움’과 세상적인 조건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결혼의 목적도 ‘신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서, 신의 뜻보다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를 아내로 삼았다. 결혼을 쾌락과 자기들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했다. 사람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신은 그 어떤 제도보다 먼저 결혼 제도를 만드셨다. 그러니 결혼은 신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워야 했다. 신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결혼은 신께서 판갈이 할 수 있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또 당시 사람들의 죄악에 세상에 범람하여 철철 넘쳐 모두가 죄악 속에 잠수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사람들이 마음에 계획하는 모든 것이 사악했다. 이들은 밥 먹듯이, 물마시듯 죄를 짓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 온통 죄악일 정도로 세상엔 죄악이 전염병처럼 꽉 깔려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말을 할 때마다 모두가 죄와 연결되어 있다. 도무지 개전의 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에 ‘죄의 찌꺼기’를 둘러쓴 인간들을 판갈이 해야겠다고 작심하셨다. 무엇을 통해서? 바로 전무후무한 홍수 통해서 대대적인 물청소를 하여 세상을 청명하게 ‘클린업’하리라고 작심하셨다. 

시대를 역류하는 의인
신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러나 아무나 붙들고 일하지 않으신다. 그 분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택하여 일하신다. 일반 회사도, 그 회사에 적당한 사람을 뽑지 아무나 뽑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노아는 신이 뽑아다 쓰실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다. 신 앞에서 경건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다. 그러니 사람이 그 시대 죄악이 만연한 사회 풍조와 분위기를 거슬러 산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왕따’ ‘은따’는 당연하고, 사회적 소외와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 그래도 노아는 죄악을 먹고 마시게 하는 타락한 세상 풍조와 시대정신을 역류하며, 뜻에 따라 세상을 헤쳐갔다. 

특히 그는 신과의 관계에서는 ‘순종이 체질화된’ 사람이었다. 신께서 노아를 택정한 다음 기상천외한 명령을 하셨다. 배의 모형도를 불러주고 그 배를 만들라고 하셨다. 그것도 바닷가나 강가도 아닌 산등성에서 건조하게 하셨다. 그 작업이 얼마나 방대하였나 하면 10년, 20년도 아닌 자그만치 120년이나 걸리는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노아는 이 명령을 어떤 자세로 받아 들였는가? 신의 명령이 너무 지나치다고 불평을 했는가? 아니면 그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거절했는가?
 
노아는 놀랍게도 신의 명령에 조금도 머뭇거리지도 않고 다음날부터 매일 아침 일찍 가족을 데리고 공사 현장으로 출근했다. 이같은 출근을 120년 동안이나 하면서 불평 한마디 없이 성실하게 해냈다. 노아가 방주를 제조할 때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는가? 비즈니스를 위한 상선이나 어선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돈벌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돈이 들어가는 방주를 만들었다. 그것도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심판을 대비한 방주를! 

노아는 신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건조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무수한 말거리와 웃음거리를 제공하는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노아를 찾아와 비웃었다. 
“어이 노아 영감! 멀쩡한 하늘에 구멍이 뚫려서 물이 쏟아진다고?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영감은 나이를 먹었는가? 더위를 먹었는가? 왜 그렇게 생고생을 하고 있어?” 

끝이 좋아야 다 좋다
그때마다 노아는 쉬지 않고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심판을 피하도록 강력히 권우했다. 
“이보게들, 그렇게 살지 말고, 제발 바르게 살아보세. 지은 죄를 뉘우치게나. 신의 심판이 멀지 않았다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노아의 부인과 아들 3남매와 자부들의 태도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와서 비웃어도 한눈팔지 않았다. 단 한 척 만드는 ‘선박회사’에 월급도 받지 않고 열심히 출근하며 성실하게 일했다. 어지간한 아들 같으면 얼마나 불평이 많았겠는가? 

“아버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버지를 ‘또라이’라고 해요. 아버지 덕분에 우리도 덩달아 ‘사이코’라는 말을 듣게 되잖아요? 도대체 끝이 안 보이는 이 일을 왜 합니까? 아버지야 신의 음성을 들으셨지만, 우리는 못들었단 말이에요. 우리 인생도 생각해 주셔야지요. 우리도 인생을 엔조이할 권리가 있단 말이오. 아버지 우리한데 웨이지 한 푼 준 적도 없잖아요?”

충분히 이런 정도의 불평이 나올만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틀렸다고 해도, 신의 계시와 명령을 분명하게 들은 그 아버지를 신뢰했다. 사람들은 다수의 여론 편에 서는 편이 훨씬 쉽다. 그래야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진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은 아무리 소수의견도 그것이 신의 음성이고, 신의 명령이라면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었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신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방주를 만들기 위해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수모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렇다고 신 말씀에 순종하되 자기 편리할 대로 조절하거나, 자기 기준대로 순종하지 않았다. 배가 너무 크다고 규모를 축소하거나, 잣나무 가공이 어렵다고 손쉬운 미루나무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 끈적끈적한 역청 대신 유성페인트를 칠하지도 않았다. 그는 신께서 명령하신 대로, 신께서 설계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 

‘시작이 반’이란 속담이 있다. 시작이 좋으면 절반은 이미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노아의 생애가 꼭 그렇다. 노아에게 홍수는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홍수 이전 그의 삶은 좋은 시작만큼이나 참으로 출중했다. 그러나 홍수 이후, 인생의 절반이 꺾어질 무렵부터 그의 가족은 처음에 좋았던 그 모습이 사정없이 곤두박질하여 깊고 깊은 어둠의 질곡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토록 멋있던 초년의 삶도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그도 ‘별수 없는 인간’이었다(그의 추락은 다음호에 다룬다). 배터리도 시간이 지나면 방전되듯이, 인생도 끝없이 담금질하지 않으면 어떤 추악한 모습으로 변질될지 모른다. 모든 사람의 평가는 관 두껑이 닫히고 난 뒤에 해야 한다고 하듯, 끝이 좋아야 다 좋은 법이다.  
  
송기태 (상담학박사, 채스우드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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