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온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리네요. 카페, 쿠링가이 이런 날은 일부 단골 고객이 찾아주는 거 외에는 손님이 뚝 떨어져 한산해요. 치폴로니 셰프가 날씨가 한층 쌀쌀해졌다며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데 일레인 아줌마가 몸을 움츠리며 들어오십니다.

“청이야, 오늘은 으슬으슬 하니 차보다는 칵테일이나 한 잔 했으면 좋겠구나. 모히토가 되는지 모르겠다.”

그 소리를 듣고 벽난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유칼리 가지를 꺾어 넣던 셰프가 가능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시네요. 셰프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니 모히토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시며 술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주셨어요.

“럼주를 베이스로 한 모히토는 원래 헤밍웨이가 즐겨 마셔서 유명해진 거란다. 사방이 온통 낙서투성이인 쿠바 아바나의 술집, 라 보데기타에 앉아 당대의 유명 작가나 영화배우와 어울려 수다 떨며 마시던 술이지. 그 양반은 글 쓸 때도 이 모히토에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고 하더구나.”

저 청이도 이런 데서 일하려면 칵테일이나 술에 대한 뒷이야기들을 많이 알아야 할 거 같아요. 그래야 손님들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끌어갈 수 있잖아요. 셰프가 시키는 대로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와 잘게 부스며 “럼주는 코냑이나 위스키에 비해서는 질이 좀 떨어지는 값싼 술이 아닌가요?”라고 물어봤어요. 헤밍웨이나 영화배우 같은 유명인사라면 당연히 최고급 술을 마셨을 것 같아서요. 셰프는 라임과 허브를 으깨던 머들러를 내려놓더니 럼주 병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으셨어요. 그러더니 흥분한 목소리 톤으로 다소 긴 럼주 얘기를 시작하시네요.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주면 신이 나나봐요. 셰프도 예외는 아니네요.  

“럼주는 칵테일의 베이스로 아주 넓게 쓰이기 때문에 많은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아왔지. 모히토를 만드는데 베이스가 되는 럼주는 식민지 시절 호주로 유배되어 온 죄수들이 빵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던 필수품이었단다. 한때 식민지 정부는 화폐가 부족해서 럼주를 임금 대신 지급하기도 했지 뭐냐. 저녁이 되어 쓸쓸해진 죄수 노동자들은 그걸 단번에 마셔버렸지. 하루치 노동을 그렇게 날려버렸으니 얼마나 허무했겠냐. 원래는 그걸 팔아서 생필품이나 옷가지 등을 사야 했는데. 초창기 호주에는 제대로 된 병원이 없어 텐트 쳐놓고 거기서 환자를 받았단다. 번듯한 병원을 지으려고 해도 돈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수입업자들에게 럼주의 독점판매권을 주는 조건으로 건설자금을 내놓으라고 해서 그 돈으로 그럴싸한 병원을 만들었지. 럼주 덕분에 만들어서 그런지 이름도  ‘럼 호스피탈’이라고 했다는구나. 그래도 그렇지 럼 호스피탈이 뭐냐. 럼 호스피탈이. 나중에 시드니 호스피탈로 이름을 바뀌기는 했지만.”

하긴 제가 생각해도 좀 그러네요. 이름 앞에 술 이름을 붙인 병원에서 어디 병이 낫겠어요. 저 청이, 모히토를 들고 나가니 일레인 아줌마는 오늘도 세스나기를 타고 아웃백에 다녀오셨다고 하시네요. 호주에서의 아웃백은 수십 킬로, 때로는 수 백 킬로 내에 공익시설이나 상가가 없는, 불같은 태양 아래 말라 비틀어진 덤불이나 붉은 모래밭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황무지를 말합니다. 일레인 아줌마는 이런 아웃백에서 캥거루와 에뮤를 사냥하며 살아온 원주민들과도 친해지고 싶어서 때로는 하루 이틀 더 연장해 가며 머물기도 한답니다. 

“청이야, 언젠가 내가 울디아란 작은 마을을 찾아가 기찻길 옆에서 야영한 적이 있었단다. 혹시라도 딩고늑대가 덤벼들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이리저리 뒤척이다 힘들게 잠이 들었지. 잠자리가 불편해서 그런지 새벽녘에 깨게 되더라. 텐트 밖으로 나갔더니 옅은 안개 속에서 야생낙타들이 하나 둘 철길 쪽으로 모여드는게 희미하게 보이더구나. 그러더니 이놈들이 철길을 따라 주욱 늘어서서 차갑고 딱딱한 레일을 긴 혀로 핥고 있지 않겠니. 그걸 보고 나는 낙타가 참 미련한 동물이로구나, 생각했었지. 그렇지 않니? 쇳덩이를 빨아댄다고 배가 불러지겠냐? 근데 그게 아니었어. 낙타가 거기 서서 레일을 핥았던 이유는 이른 아침 레일에 맺힌 이슬로 목을 축이기 위해서라는 소리를 나중에 들었단다.”

일레인 아줌마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대부분의 무지가 편견을 낳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원주민에 대한 백인들이 지녔던 무지나 팔조차 가누지 못하는 대니얼의 부정확한 발음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무관심이 결국 편견, 더 나가서는 증오까지 낳는다고 하네요. 

박하사탕 깨물었을 때처럼 알싸한 냄새가 카페 안을 휘돌고 있어요. 돌아보니 사장님이 벽난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마른 유칼리나무 가지를 넣고 계시네요. 탕.탕.탕. 빗방울이 뒷마당 양철지붕을 심하게 내리칩니다. 때마침 서울 다녀오신 배 사장님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시며 “어이 추워” 하시네요. 오세요. 어서 오세요. 카페, 쿠링가이는 관심과 배려로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주는 우리 모두의 향연장입니다.

박일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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