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점심시간에 단체 손님이 몰려와 혼을 다 빼놓고 갔어요. 헉스베리 강 건너에 있는 쿠링가이 에콜로지 센터가 창립기념일이라고 해서 파티를 저희 카페에서 했거든요. 3시 쯤 행사가 끝났을 때는 저희 카페 직원들은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어요. 하지만 장사가 잘돼서 다들 기분만은 좋네요. 근데 참 이상해요. 이런 날은 저녁장사가 시원치 않아요. 컴퓨터를 들여다보니 예약 손님도 없네요. 날이 어둑어둑해서 밖에 나가 가스등을 켰어요. 매일 저녁만 되면 노즐을 열어 가스등을 켜고 장사를 마친 다음에는 그걸 다시 잠가 불을 끈다는 것은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에요. 그래서 사장님한테 가스등 대신에 켜고 끄고 편하게 그냥 전기 외등으로 바꾸자고 건의해도 이건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사장님이 이 카페를 인수하기 전부터 내려온 카페, 쿠링가이의 전통이라며 반대하시네요. 입구에도 남들은 넓고 편한 자동 유리문을 쓰는데 저희 카페만 묵직한 호두나무 문을 고집하는 분이니 더 이상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좀 귀찮아서 그렇지 가스등이 꼭 나쁜 거만은 아니에요. 손님들 중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램프 속에서 춤추는 불꽃을 바라보면 옛 생각이 난다는 분들도 더러 계시거든요. 특히 요즘처럼 쌀쌀한 밤에는 차가운 형광등 불빛 보다는 가스 호롱불이 훨씬 따뜻하고 정감이 있어 좋다고들 하세요. 8시를 조금 넘기자 데이빗이 여자 친구인 샤론과 함께 카페를 찾아주셨어요. 의료기기 판매업을 하는 데이빗도 사장님처럼 휠체어를 타는데 저희 카페의 오랜 단골손님이세요. 벽난로 근처에 자리를 잡은 데이빗과 샤론은 식사는 이미 했다며 뮬드 와인 한잔 마시고 싶어 들렀다고 합니다. 

“데이빗이 감기 기운이 있으니 계피나 생강이 있으면 넉넉히 넣어주세요.” 긴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 넘기며 샤론이 말했어요.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감기 걸린 사람이 주위에 많아요. 유럽여행 중에도 멀쩡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방심해서 그런가 봐요.”  
 
저희 카페에선 손님들이 뮬드 와인을 원하는 경우 값이 저렴한 맥귀간 메를로에 오렌지와 생강을 넣어 데워 만든다고 설명을 드린 후 “생강 외에 특별히 첨가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의견을 물었어요. 
 
“브랜디가 있으면 요 정도 잔으로 하나만 넣어주세요.” 데이빗이 잔의 사이즈를 알려주듯 엄지와 검지를 반 뼘 정도 벌리며 말하네요. 데이빗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사무실에 계시던 사장님이 나오시며 반갑게 인사를 하십니다. 

저 청이, 셰프가 만들어준 뮬드 와인 두 잔을 들고 나가자 샤론이 저한테 줄 선물이 있다며 옆에 앉으라고 합니다. “청이 씨 주려고 프라하에 갔을 때 샀어요. 지난번에 통역하느라 수고 많았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떠나서 미안해요.” 샤론은 핀이 달린 크리스탈 유니콘을 핸드백에서 꺼내주며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짓네요. 지난여름 제가 한국교포 커뮤니티에 나가서 통역을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샤론은 그게 고마웠었나 봐요. 샤론은 재활의학을 전공하고 있어 가끔 소수민족 커뮤니티에도 봉사를 나간답니다.    

“선물 고마워요. 이걸 꽂으면 훨씬 우아하게 보일 외투가 방금 생각났어요. 잘 쓸게요.” 저 청이, 그녀가 준 크리스탈 유니콘 옷핀을 들여다보며 말했습니다. “저는 아직 해외여행을 떠난 적이 없는데 프라하는 꼭 가보고 싶어요.” 라며 관심을 보이자 샤론은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편하게 앉아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벽난로 불빛이 그녀의 얼굴로 붉게 번지네요.        

“어스름해질 무렵 돌 깔린 백양나무 골목길을 빠져나와 프라하 성으로 올라가는데 여기처럼 가스등으로 불을 밝힌 카페가 나오더군요. 냄새가 좋아 들어가니 장작으로 오리고기를 구워 팔고 있었어요. 데이빗은 맥주를 좋아해요. 그래서 여행지를 가면 꼭 그 나라 맥주를 마시고 싶어해요.” 데이빗의 휠체어를 만지며 샤론이 말했어요. “거기서 오리고기와 맥주를 시켜 마셨어요. 말라스트라나 광장에서는 비가 내리는데도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악사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요. 카페를 나와서 프라하 성당과 연금술사와 세공사들이 살았다는 골든레인을 차례로 돌아봤지요. 거기 골든레인 크리스털 세공가게에서 이 유니콘 핀을 샀어요. 세상 어느 남자든지 이걸 지닌 여성을 보게 되면 한 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져든다고 하네요. 청이 씨야 원래 예쁘니까 이런 거 없어도 남자들이 따르겠지만.” 샤론은 웃으며 자기 말에 동의해 달라는 뜻으로 데이빗을 바라보았어요. 

다양한 양식의 은백색 고대 건축물을 지닌 천년의 고도, 프라하. 중세의 그윽한 향기를 그대로 간직한 시가지를 굽이굽이 흐르는 몰다우 강. 찰스브릿지. 사랑과 낭만의 다리 위로 모여드는 노점상과 뜨내기 예술가들. 그들이 벌리는 신명나는 놀이판에 동참하기 위해 금방이라도 내려설 것 같은 조각상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데이빗과 샤론은 이제까지 돌아본 여행지 중에서 프라하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네요. 특히 프라하의 구시가지 시계탑은 우리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타운홀 시계탑 양옆에는 재미나는 인형들이 서 있어요. 시계 왼 편에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인형과 돈지갑을 든 유태인이 있고 오른쪽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터번을 둘러쓴 인형이 서있어요.” 라고 데이빗이 말하네요. “해골인형은 매 시간마다 모래시계를 뒤집고 나서 운명의 종을 치는데 그 옆에 서 있는 인형들은 흘러가는 시간에 저항하며 죽지 않겠다고 열심히 고개를 가로젓고 있어요. 하지만 해골인형의 시간은 허영과 부와 명예가 모두 부질없음을 보여주지요.”

그래서 그런지 데이빗은 2만 달러를 은행에 넣어두기보다는 그 돈으로 여행을 떠나겠다며 여행은 인생의 메타포라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데이빗은 번거롭지만 아직도 가스등을 켜고 무거운 호두나무 문을 열어야 들어가는 카페, 쿠링가이에 잘 어울리는 손님입니다. 

박일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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