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과 출간, 강연 등으로 한국에서 활동 중인 신아연 작가가 최근 인문 에세이집 <내 안에 개있다>를 내고 3년만에 시드니를 찾았습니다. 호주 한인 사회의 오랜 벗인 신 작가는 그간의 격조했던 교민들과의 시간을 
'신아연의 인문 에세이'를 통해 메우겠다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의 경험을 통찰력 깊은 인문적 사유로 녹여내는 신아연 작가의 글에 한호일보 애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기대합니다. - 편집자 주(註) 


지인들과 만나 담소하는 중에 돈 많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물질 소유 서열 상위 10%가 국민 전체 소득의 45%를 독식한다는 이야기 끝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지인 중 하나는 자기가 옆에서 본 어떤 부자는 100평 아파트에 살면서 밤이면 밤마다 룸살롱에서 5백만~천만 원을 술값과 접대비로 쓴다고 했습니다. 그쯤 되면 ‘돈을 물 쓰듯’ 하는 게 아니라, ‘물을 돈 쓰듯’하는 사람일 텐데 한 끼 밥값으로 쳐서 그 정도를쓸 수 있으려면 재산이 한 5천억 원쯤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옆자리의 다른 지인이 거듭니다.  

단순 계산하여 총자산이 5억 원인 사람이 5천 원짜리 점심을 먹을 수 있다면 그보다 자산이 천 배 많은 사람이 한 끼에 5백만 원 짜리 밥을 먹는다 한들 ‘분수’에 어긋나는 짓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돈도 없는 주제에 ‘5천 원짜리씩이나’ 먹는 것이야말로 분수 모르는 짓이자 경우에 따라‘호화사치’를 누리는 일이 될 겁니다. 또 다른 예로  보통 사람이 형편보다 조금 무리해서 20만 원짜리 핸드백을 샀다면 5천억 재산가 역시 천 배에 해당하는 2억원 짜리 가방을 ‘큰 맘 먹고’ 샀다고 해서 손가락질받을 일이 아니라는 거지요. 분수에 넘치기로 치자면 둘 다 비난을 받거나 아님 둘 다 그러려니 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제논의 역설’을 떠올리게 하는 궤변 같지만 그렇다고 돈 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의도나,분배의 불균형을 개탄하며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자 모인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한국의 천박한 부자들의 실상과 현실이 그렇다는 말이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돈이 많다고 특별히 행복한 것도 아닌 것이, 예로 든 그 부자는 돈문제로 인해 일생 두통에 시달린 탓에 진통제 없이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고, 술과 여자 외에는 안식을 취할 곳이 없다고 하니까요. 왜냐하면 자기만 보면 죄다 돈을 뜯어가려 하니 주변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고, 본인 스스로도 다가오는 사람마다 돈을 노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소리가 제게는 마치 중증 비만에 걸린 사람, 너무나 뚱뚱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럼에도 온종일 오직 게걸스레 먹을 궁리만 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즉, ‘돈만 있는사람’이란, 마치 비정상적 몸집 비대로 대사 증후군에 걸린 것처럼 정상적인 인간관계나 평범한 사회 생활을 할 수 없는 매우 불행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공평한 거지요.”
 
모임 자리의 마지막 말을 귓등에 얹고, 지인의 계산법대로라면 ‘분수에 넘치게 사치스러운’ 4.5평 내 집(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늘 곁에 두고 읽는 동양 철학자 박희채의 <장자의 생명적 사유>를 떠들어
보며 장자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누가 나를 이렇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했다. 부모인들 어찌 내가 가난하기를 바랐겠는가?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줌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줌이 없으니 하늘과 땅인들 어찌 사사로이 나를 가난하게 하겠는가? 그래서 나를 이렇게 만든 존재를 찾아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운명일 것이다. 

“장자는 빈곤의 원인을 사회적 관계에서 찾으면서도 일종의 명(命)으로 보았던가 봅니다. 속된 말로 장자 자신도 ‘찢어지게’ 곤궁한 처지에서 내린 결론이니만큼 그 말이 제게는 ‘죽고 사는 것이 인간의 소관이 아니듯 빈곤과 부귀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로 들립니다. 장자의 말대로 지금 내가 왜 이렇게 궁핍에 처하게 되었는지 까닭도 모른 채 그러니까 그렇다라고 할 밖에요. 같은 말을 하룻밤에 천만 원을 쓰는 사람에게 묻는다 해도 자기가 왜 그렇게 돈이 많은지 잘 모르겠다고 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많으니까 많다고 하겠지요.

남보다 딱히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지만 어떤 사람은 부자로 살고 어떤 사람은 일생이 가난합니다. 흔히 부자라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둥, 가난하다고 행복하지 말란 법이 없다는 말 따위가 제게는 그저 허허롭게 들립니다. 그런 말은 여전히 부(富)와 천(賤)이 인간의 어떤 할 탓에 있다는 인식, 말하자면 ‘명’이 아닌 인간의 영역이라는 사고 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마음의 반영이니까요. 현실에는 행복한 부자도 있고 안 행복한 부자도 있고, 행복한 빈자도 있고 안 행복한 빈자도 있습니다. 그러니 가지고 못 가진 것에 행복이라는 명패를 갖다 붙인 자체가 그릇됐다는 것이 요즘 드는 제 생각입니다. 행복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라고. 

장자는 오늘도 저를 다독거리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운명일 거라고, 가난하니까 가난한 거라고, 그러니 그냥 순응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속박과 갈등과 질곡과 근심을 벗고 자유로워지라고. 그저 물 흘러가듯 살며 안시처순(安時處順)하라고.

신아연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1992년에 호주로 이민,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현재는 한국의 신문, 잡지, 방송사등과 일하며, 중앙일보, 스크린골프다이제스트, 자유칼럼그룹,자생한방병원, 여성중앙 등에 글을 썼거나 쓰고 있다.

저서로는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자식으로 산다는 것 (공저)> 등이 있다.

- 블로그 : 스스로 바로 서야지, 세워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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