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보다 날씨가 더 나빠졌어요. 블루마운틴은 햇빛 한 줄기 들어올 틈 없이 구름이 두텁게 온 숲을 덮고 있네요. 게다가 비까지 와서 몹시 춥습니다. 가슴에 반짝반짝 빛나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젊은 승무원인 니콜라스는 언 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기관차와 객차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새미르는 합장한 채 연신 “나마스테”를 외칩니다. 

쉬익쉬익 흰 연기를 내뿜으며 클레어렌스 역을 출발한 지그재그 기차는 아치형 나무다리를 건너고 빽빽한 자작나무 숲 사이를 스치듯 지납니다. 기차가 안개로 둘러싸인 산모퉁이를 돌아 나가자 고래입처럼 컴컴한 굴이 입을 떡 벌리고 나타났습니다. 메케한 석탄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터널을 나오자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마구 비를 뿌려댑니다. 때를 맞춰 기차는 신이 난 듯 기적소리로 화답합니다. 승객들도 너나없이 연기로 검어진 얼굴들이지만 동심으로 돌아가 소리를 질러댑니다. 암벽과 유칼리 숲을 헤치고 아이들은 신비의 세계로 또 어른들은 추억의 세계로 진입합니다.

새미르가 창가에 기대서서 보조기관사인 니콜라스와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네요. 처음에는 승객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기적 소리가 너무 커서 손짓으로만 대화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새미르한테 들어 보니 니콜라스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고 하네요. 새미르가 지그재그 기차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수화로 몇 가지 물어봤다고 합니다. 새벽 동이 트기 전의 상쾌한 공기, 새미르. 그러고 보니 그는 재주가 참 많은 사람이에요. 

지그재그 기차가 블루마운틴 정상에 도착해 보니 함석지붕을 이고 있는 간이역이 연기에 잔뜩 그을린 모습으로 플랫폼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래로 올망졸망한 산과 몇 채의 집과 개울이 내려다보입니다. 메케한 석탄냄새를 맡아가며 몹시 흔들리는 기차를 타서 그런지 멀미가 났어요. 새미르가 매점에 들어가더니 유칼리 사탕을 한 봉지 사갖고 와 멀미에 도움이 될거라며 먹어보라고 하네요. 한 알을 입에 넣어보니 한결 속이 진정되네요. 자상하고 예의바른 새미르, 그때서야 저 청이는 수화를 하게 된 동기가 무어냐고 물어봤어요. 

새미르는 네팔의 한 작은 산골 마을인 주믈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대요. 근데 거기는 벌목장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고와 온종일 터지는 광산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음 그리고 비위생적인 생활로 귀 먹은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고 합니다. 새미르 주변에도 청각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많아 자연히 수화를 익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새미르는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수화가 필요했었다면서 “친구들이 내게 올 수 없다면 내가 그들 곁으로 다가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고 은자의 나라에서 온 사람답게 심오한 내용을 그러나 아주 침착하고 태연스럽게 말합니다. 저 청이는 이것도 새겨두고 싶어 적어뒀으면 하는데 오늘은 수첩을 가져오지 않았네요.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은 하버드대학 졸업식 초청연설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워온 중요한 교훈 중에 하나가 바로 이웃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보았던 고문당하거나 억울하게 사형 당한 사람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처지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고 그런 경험들은 자신이 상상력이나 감정이입의 능력을 갖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새미르 역시 네팔의 어려운 친구들을 생각하며 이해와 연민이라는 또 다른 소통을 위해 여기 호주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간이역 뒷편으로 지그재그 기차를 움직여 줄 석탄이 잔뜩 쌓여있었고 우거진 고사리 숲에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는데 그 위를 축축한 이끼와 버섯이 덮고 있네요. 어두컴컴한 전나무 숲을 지나온 차가운 공기가 온 몸을 훑고 지나갑니다. 새미르가 외투와 목도리를 벗어 걸쳐줍니다.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새미르가 따뜻하게 손을 잡아줘서 그런가요. 카카오 열매를 따먹고 취한 콜롬비아 고원의 산양처럼 저 청이는 지금 마법에 잔뜩 걸려 꼼짝할 수가 없네요.

박일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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