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아버님은 이 달에 96세 생신을 맞았습니다. 지난해 생신 때 자손들이 큰 절을 올리며 “백살까지 사세요.”라고 했더니 “그럼 앞으로 5년 밖에 안 남았네…” 하며 서운해 하셨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자손들이 실수한 거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유행가 ‘백세인생’의 노랫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6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 7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 8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9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해라~ / 100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 8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자존심 상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 9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텐데 또 왔냐고 전해라~ / 10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극락 왕생할 날을 찾고 있다 전해라~ / 150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나는 이미 극락세계 와 있다고 전해라~”

인구에 회자되는 ‘백세시대’에 걸맞게 만들어진 유행가답게 그런대로 가사에 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 노래가 세대별로 어떤 느낌일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전적으로 공감하는 세대는 60대 이상이겠지만 50대에 접어든 사람들 역시 ‘예비 공감군’에 속할 것입니다. 저는 왠지 여생을 어떻게든 늘려 붙잡고 싶은 집착과 장수에 대한 초조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듣기에 좀 거북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관조나 여여함은 150세에 와서야 약간 엿보이는 듯도 한데,  “이미 극락세계에 와 있다고 전해라”는 부분에서 그렇게 느껴집니다. 하기사 150세쯤 되면 어떤 식으로든 생에 대한 의욕을 접게 될테지만요.

.‘생사(生死)’의 어원을 보면 ‘生’은 풀과 나무의 싹이 흙에서 솟아나오는 모양을 본 뜬 글자이며, ‘死’는 그것이 다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말이 그렇고, 생각이 그렇지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닥치지 않을 일이 아니고, 도망간다고 해서 피해질 일이 아니니 우리 나이가 되면 죽음에 대해 각자 어떤 준비를 해 둬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자의 제물편에는 “어려서 죽은 아기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하면, 팽조를 일러 요절했다고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인생이 아무리 길어도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팽조가 800년을 살았다 한들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고 할 것도 없고, 반면 찰나에 비한다면 어려서 죽은 사람도 영원의 시간에 가깝도록 산 것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라 한들 애닯아 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라고 해도 이미 영원을 살았으니까요. 중년 이후 삶의 시간이 지나치게 빨리 가는 것 같고 그래서 조급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행가 가사에 공감하는 사람도 많은 거겠지요.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이미 영원을 산 사람들인데 아쉬울 것이 뭐가 있을까요?  

젊어서 죽는 것이 비극이 아니라 70세까지 살아도 인생을 제대로 못 살고 죽는다면, 그것이 바로 비극이라고 39세에 요절한 흑인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도 말한 바 있지요. 결국 인생은 양이나 길이가 아니라 질과 의미가 결정한다는 뜻이겠지요. 지금 제가 염려하는 것도 100세, 150세를 산다 한들 결국 쭉정이만 남았을 뿐, 알곡이라 할 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고 전해라~는 말을 남기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것입니다. “그 인생, 의미 있었다고 전해라!” 이것이 제가 저의 죽음 앞에 듣기 원하는 말인데 말이죠.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1992년에 호주로 이민,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현재는 한국의 신문, 잡지, 방송사등과 일하며,  중앙일보, 스크린골프다이제스트, 자유칼럼그룹, 자생한방병원, 여성중앙 등에 글을 썼거나 쓰고 있다.

저서로는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자식으로 산다는 것 (공저)> 등이 있다. 

블로그 : 스스로 바로 서야지, 세워져서는 안 된다 
http://blog.naver.com/jinwonkyu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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