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는 부모의 돋보기”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고 한다. 외모만 부모를 복사한 듯이 꼭 빼어 닮은 것이 아니라 하는 행동까지도 꼭 그대로 하기 마련이다. “아이가 아버지를 닮았으면 유전이고, 옆집 아저씨를 닮았으면 환경”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부인이 한번은 아들의 밥 먹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아, 어쩌면 그렇게도 그 아버지를 꼭 닮았던지! 먼저 수저를 들고 바지에 쓱싹 문지르며 물기를 닦은 다음, 숟가락을 국그릇으로 가져가는데, 후후 불면서 국을 마시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버지 모습이었다. 젓가락으로 식탁을 두 번 탁탁 때리고는 김치그릇으로 가는데 꼭 아버지처럼 처음 줄기 부분은 옆으로 휘젓고 두 번째 잎 부분을 가져다가 서걱서걱 소리 내 씹는 모습은 물론이고, 씹는 소리까지 똑같이 들리더라고 했다. 

환경인가, 유전인가? 말 없는 ‘밥상머리 교육’이다. 이처럼 부모의 언행심사는 은연 중에 아이에게 전달되고, 교훈되고, 모델이 된다. 거울처럼 보여줄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있다. 

“문제 아이 뒤에는 문제 부모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가인의 스토리’는 “자녀는 부모의 거울” 정도가 아니라 “자녀는 부모의 돋보기”라고 할 수 있다. 가인을 통하여 그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부부 사이를 돋보기로 보듯이 시원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낙원에서 쫓겨난 이들 부부는 처음 황량한 땅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하여 적응하기까지 얼마나 부부싸움을 심하게 했던지... 그때 그 집의 접시였던 가볍고 납작한 돌을 하도 자주 던지다 보니 남아나지 않았다. 바깥에 일하러 간 아담은 납작한 돌 접시를 구해오는 것도 일과 중에 하나였다. 그뿐 아니었다. 베개로 쓰던 제법 큼직한 돌을 던지다 보니 벽을 뚫고 바깥에 지나가던 뱀의 머리까지 맞춰 죽일 정도였다. 
어지간하게 부부싸움을 많이 했다. 왜냐고? 그만큼 두 사람은 서로에게 쌓인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얽힌 것도 많고, 맺힌 것도 많고, 상처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부부 싸움하던 일거수일투족이 그들의 첫 아들에게서 돋보기로 확대해 보듯이 더 크고 엄청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는 이들 부부에게 둘째 아들을 가슴에 묻는 비극을 가져오고 말았다. 임신 중에도 여전히 유효한 경구가 있다.  
“부부싸움으로 그릇이 깨지면 가족관계가 깨지고, 부부의 옷이 찢어지면 자녀의 가슴이 찢어진다!”

인류 족보의 첫 아들
그렇다고 인류의 첫 부부인 아담과 하와가 허구한 날 싸움만 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낙원을 떠난 고달픈 ‘초기 이민생활’이 어느 정도 정착되고, 어려운 세상살이도 적응이 되고,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첫 호적에 기록될 아들도 낳았다. 그 아들을 낳을 때, 인류의 첫 어머니가 된 하와는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산부인과도, 마취도, 무통분만도 없던 그 시절, 엄청난 해산의 고통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금세 잊어버리고, “내가 신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창세기 4:1~2)하며 너무너무 기뻐 환호했다. 아비를 쏙 빼놓은 듯한 아들을 보고 얼마나 신비스럽게 여겼을 것인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둘째아들, 아벨을 낳을 땐 이런 감동적인 언어가 없다.  
출생부터 가족 사랑과 기쁨과 기대 속에서 출발한 첫아들! 그 아들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적통이었다. 장남으로서 농사를 지어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자부심도 가졌고, 장자로서의 특권을 다 누렸다. 반면 둘째 아벨은 양을 키웠다. 이때 양은 식용으로 기르지 않고,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 길렀다(인류 육식은 노아 홍수 이후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1년에 양가죽으로 옷을 몇 벌이나 해 입겠는가? 즉 가인은 매끼니 때마다 가족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반면, 아벨은 가족들을 위해서 1년에 한두 번 겨우 생색이나 낼 정도이다. 아벨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집안에서 온갖 기대와 인정받고 있었으며, 더 큰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아담은 당연히 장남이자. 자기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가인을 좋아했다. 그리고 함께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서 크고 작은 집안일도 의논했다. 자식 둘이 생기고,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그토록 싸워대던 부부는 ‘우리가 이렇게 밤낮 싸움만 하면서 허송세월하면 안되지’하는 각성이 생겼다. 그러자 자연스레 그들의 신을 생각해내었다. 신에게 제사 드려야겠다는 뜨거운 감동이 일어났다. 이들 부부가 서로 죽기 살기로 덤벼들며 전쟁터를 방불하던 부부싸움을 그치고, 이런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은 아마 가인을 낳고, 둘째 아벨을 임신한 때부터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가인이 나중에 돌을 들어 동생을 쳐 죽인 사건과, 아벨이 경건하게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첫 아들 가인은 아버지의 고통도 들으며 집안의 갈등과 분쟁도 조정했다. 집안에서 드리는 제사도 상당 부분 가인이 주도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가인이 곡식을 가져오니 아벨도 군소리 안하고 양을 가져온 것을 보아도 그렇다. 가인은 적극적으로 추진력있게 일하는 반면, 아벨은 양이나 키우며 조용히 명상이나 하며 별로 나서지 않고, 소극적으로 사는 스타일 같다.   
               
가인, 그 몰락의 자리로
참으로 멋있게 인생을 출발한 첫 아들, 가인! 그러나 ‘가인’은 성경에서 ‘가룟 유다’와 함께 가장 저주받은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이름으로 언뜻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류 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친동생을 돌로 쳐 죽인 직계존속살해범, 최초의 암매장자, 인류 최초의 방랑자, 거짓말쟁이, 변명가’ 등등 인간의 가장 추악한 죄인의 표상으로 낙인찍으며 선입견을 갖지는 않을까?
물론 가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쳐 죽이려고 날카로운 도끼를 들고 태어난 악질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생보다 먼저 제물을 들고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 나아왔다. 적어도 살인사건 이전까지, 표면적으로 그는 경건한 신앙인이었고,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놀라운 축복의 자리에서 그 모든 축복을 상실하고, 처참하게 몰락한 가인의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가인처럼 타락할 가능성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황순원 작가의 <가인의 후예>도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의 발단, 문제의 장소, 문제의 날짜는 다름 아닌 신에게 경건히 제사지낸, 그 장소, 바로 그날에 그의 생애에서 가장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 요즘말로 예배(미사)드리고 나오면서 살인사건이 가장 엽기적인 막장드라마요, 톱뉴스감이었다. 당연히(?) 그에겐 그럴만한 핑계거리가 있었다. 그의 제물(곡물)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신께 거부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그것도 함께 제사 드린 동생 제물(양)과 동생은 신께서 소롯이 그대로 받아주시면서 말이다. 이럴 때의 난감함, 굴욕감, 치욕감, 모욕감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다. 
‘아니 신은 정육점 아저씨 고기는 받아주시면서, 방앗간 아저씨 쌀은 안받아주시나? 신은 사람을 차별하는가? 직업을 차별하는가? 아니면 물건을 차별하는가? 이렇게 무시하고, 동생 앞에서 망신을 주어도 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마크 듀퐁이 피력한 대로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상처가 되는 감정 중 하나는 거절감이다”라는 말로 가인을 변호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은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점잖은 말로 그를 훈계할 것인가?

송기태(상담학박사, 채스우드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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