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중매를 서지 않는다. 친아버지가 아들을 칭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같으면 찬성하고 자기와 생각이 같지 않으면 반대한다. 자기와 같은 것을 맞다 하고, 자기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한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분된다고 말합니다. 언어를 매개 수단으로 세상과 만나고 타자와 교감하며 소통하고 이해합니다. 실은 논쟁하고, 시비하고, 말꼬리 잡고, 자기 말만 옳다고 하기 위한 대결과 투쟁의 ‘무기’로 각자 자기 언어를 ‘장착’하고 있는 느낌을 무시로 받지만 말입니다. 

위의 인용은 장자의 말입니다. 직업이란 게 다 그런 요소가 있지만 저 또한 말과 글로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때때로 언어의 무망함과 환멸을 느낄 때 장자의 언어관을 통해 위로와 쉼을 얻곤 합니다. 혹여 지금 말과 글로 난도질 당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제가 읽고 있는 동양 철학자 박희채 저 <장자의 생명적 사유>를 통해 마음을 추스르길 권합니다. 몇 구절 옮겨 보겠습니다. 

“언어의 ‘의미’는 자기를 중심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마음은 다양한 측면 중 하나에 고정된 견해이며, 자아가 개입되어 ‘이것이 옳다’[是]라고 선택하면서 시작된다. 타자를 언어로 규정하여 고정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언어에 대해 자아의 개입이 심화될수록 성심(편견이나 선입견 등 이미 고정되어 있는 마음)은 더욱 편파적이며 부분이 되는 것이다. 장자는 이러한 인간의 경향으로 인해 언어와 실재의 간격이 더 멀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노하는 까닭은 다른 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과 치우친 말 때문이다.

말은 감정에 의해 확대되며 객관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장자는 살아 숨 쉬는 현장에서 말 그대로를 바라보고자 하였다. 사람은 말로써 상대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한다. 하지만 언어가 내용을 담아내는 한계로 인하여 서로 간의 소통은 쉽지 않고 의견 차이가 발생한다. 문제는 대화를 할 때 상대가 자기 의견에 동의하기를 바라는 점이다. 만약 상대가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시비의 논쟁이 벌어진다. 장자는 이러한 논쟁에 대하여 ‘변무승(辯無勝)’이라고 했다. 즉 논쟁으로는 승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우주 밖의 일에 대해 성인은 마음에 두고 논의하지 않으며, 우주 안의 일에 대해서는 논의하기만 하고 평가하지 않는다. 성인의 일이 기록된 <춘추>에 대해 성인은 평가만 하고 논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자는 논의[論], 평가[議], 논쟁[辯]을 구분하여 말하고, 논쟁이 가장 낮은 단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논쟁은 결국 옳고 그름에 대한 서로간의 의견 대립이다.” 

화자와 청자가 언어라는 형식의 그릇을 통해 말 자체는 주고받았지만 그 ‘그릇’에는 각자의 경험적 내용물이 미리 담겨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과 뒤섞여 각자 다른 해석, 다른 의미로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의사 전달을 어떻게든 명료하게 하기 위해 여북하면 장자는 우언(寓言) 중언(重言) 치언(?言)에, 은유까지 끌어들였을까요. 아시다시피 우언은 ‘친아버지는 아들의 중매를 서지 않는다’는 식으로 비유, 암시, 풍자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중언은 ‘누가 말씀하시길’ 하는 식으로 그 분야의 권위있는 사람의 이름을 빌려 설득력 있게 설명해 보려는 것이며, 치언은 취중진담이란 말처럼 무심, 방심한 상태에서 오히려 진심을 쏟아내게 되니 그 언어가 믿을 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저도 제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기에 ‘장자가 말하기를’ 하는 식의 '중언'으로 이 글을 쓰고 있나 싶습니다. 

인간에게는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며 언어로 타인을 이해하는 것 외에 달리 소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새삼 절망스럽습니다. 더구나 그 불충분한 수단을 생업의 도구로 삼아야 하는 사람들의 위험천만한 위태로움이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우언으로도, 중언으로도, 치언으로도 심지어 비유로도 자신의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없다면 침묵하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겠습니다. 장자 역시 서로간의 갈등과 반목에 대해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을 만큼 언어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니까요. 상대가 내 말을 알아들었을 거라고, 나를 이해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직접 당하기 전까지는 어차피 깨닫지 못하는 법이니 말입니다.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1992년에 호주로 이민, 호주동아일보와 호주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현재는 한국의 신문, 잡지, 방송사등과 일하며,  중앙일보, 스크린골프다이제스트, 자유칼럼그룹, 자생한방병원, 여성중앙 등에 글을 썼거나 쓰고 있다.

저서로는 <내 안에 개있다> <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자식으로 산다는 것 (공저)> 등이 있다. 

블로그 : 스스로 바로 서야지, 세워져서는 안 된다 
http://blog.naver.com/jinwonkyu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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