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회에 잘 적응 못하는..."
 
 46세 늦깍이 데뷔..왕성한 연주 활동
“흡인력 강한 절절한 노래로 아픔 치유”  

2012년 소리꾼 장사익(67)은 전남의 한 마을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었다. 그 지역의 의료 관련 봉사단체로부터 소박한 공연을 부탁받고 흔쾌히 승낙했는데 입소문이 나 지역 주민들까지 수백 명이 몰려 그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을 10여 분 남겨놓은 시각, 주최측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임종을 앞둔 분의 아드님이 장 선생님께 노래 한 자락 불러주십사 부탁드리네요.”
병실에 들어서니 할머니 한 분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고 아들이 조용히 그를 맞았다. 의식이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환자 곁에서 장사익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그가 노래를 끝내자 갑자기 할머니가 눈을 떴다. 입을 벌린 채 천장 쪽을 잠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숨을 거뒀다.
“편히 가셨지유. 원래 ‘봄날은 간다’가 일종의 장송곡이거든요. 많은 사람 앞에서 부르는 노래도 의미가 있지만, 하찮은 내 유행가 하나가 세상을 뜨는 분에게 음성공양(音聲供養)을 한 셈이지유.”
 

“다양하게 펼쳐지는 모습이 마치 인간사 같아요”

남쪽으로 낸 거실 통유리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맨발로 스스럼없이 손님을 맞은 장사익은 연신 녹차를 우려내며 말을 이어갔다. 서울 표준말과 고향 충청도 사투리가 섞여서 나왔다.
그의 자택(서울 종로구 홍지동)은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 5m는 족히 될 거대한 바위가 마당 쪽에 직벽으로 기대 있고, 집 맞은편에는 인왕산 뒤쪽이 아주 가까이에 펼쳐져 있다. 무성한 잣나무, 소나무가 지척에 보였다. 그는 15년 전에 이 집을 마련했다. 

Q 산 가까이에 거처를 마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지금은 체력이 떨어져 못하고 있지만 3년 전까지만 해도 새벽 3~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산길을 오르내렸지요. 주말엔 두어 시간 산행을 하고요. 몇 시간씩 걸려 멀리 있는 산을 찾아다니느니 늘 산을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사시사철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홍성군 광천이 제 고향인데, 웅변 연습한다고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5년 동안 거의 매일 마을 뒷산에 올라 소리를 질렀거든요. 목청을 틔우기 위해서. 어린 시절부터 워낙 산에 익숙해요.”

Q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란 말도 있듯 강이나 바다 같이 물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산의 어떤 점에 마음이 끌리는지요?

A “산에 둘러싸여 포옥 파묻혀 있는 느낌이 저는 좋습니다. 마치 부모님 품처럼. 물은 1년 내내 똑같지만, 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다르니까요. 봄은 봄답게 화려하고, 여름은 무성하며, 가을은 나이 먹은 티를 내며 붉게 물들지 않습니까. 겨울은 다 벗어버린 채 황량하지만 가끔은 하얀 눈으로 덮이고…. 다양하게 펼쳐지는 모습이 마치 인간사 같고, 그래서 더 우리에게 친숙한 게 아닌가 싶어요. 게다가 이렇게 산을 끼고 살면 온갖 새와 벌레들 소리, 바람 소리, 빗소리도 선명히 들리지유. 자연을 늘 곁에 놓고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어린 시절 장씨는 서향집에 살아 항상 붉게 노을 지는 해만 봐야 했다. 나이 들어선 동향집만 고집한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본다. “눈만 뜨면 관악산, 북한산을 볼 수 있는 서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유? 하루 한 번이라도 살짝 고개만 들면 되는데 그걸 안 하니….”

Q 1995년 <하늘 가는 길> 이후로 <꽃인 듯 눈물인 듯>(2014년)까지 음반을 8집이나 내셨는데, 그중에 산을 소재로 한 노래도 있습니까?

A “<꿈꾸는 세상>(2003)에 실린 타이틀곡이 그렇겠네요. 나도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볼까, 하는 가사의 노래지유.”

그는 이 대목에서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 맑은 물 흐르고 푸른 산 드높은 그런 세상 꿈을 꾸며 날고 싶어요.”
장사익은 가난한 시골 생활을 벗어나려 서울로 올라왔고, 선린상고 3학년 2학기 때 보험회사 사무직에 취직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가구점 직원, 독서실 주인, 카센터 사무장 등 열댓 개 직장을 전전했다. 노래 부르는 게 좋아 퇴근 후엔 짬짬이 낙원상가 음악학원을 다니며 가요의 기본과 샹송 등을 배웠다. 

Q 직장 10여 곳을 전전하며 가족에 대한 책임에 ‘밥벌이’로 일을 하면서도 국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A “동호회와 명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단소, 피리, 대금 등을 배웠지요.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는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태평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한 3년이면 프로가 돼 밥은 먹을 수 있으리라 믿었지유.”

그는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합류해 태평소를 불었고, 공연이 끝난 후 뒤풀이에서 흥이 오르면 곧잘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본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무대에 서보라고 권했다. 1994년 11월, 홍대 근처 10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장사익의 공연이 열렸고, 이틀 동안 800명이 들어 매스컴에도 소개됐다.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Q 서태지, 김건모, 신승훈 같은 20년 후배들이 가요계 정상을 주름잡던 시기에 등장해 ‘트로트풍 대중가요, 판소리, 재즈 등이 혼합돼 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본인의 창법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A “요즘 사람들은 뭐든지 한마디로 규정하고 고정화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구분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인데, 과연 그게 타당한 일인가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도 별별 퍼포먼스를 다 했잖습니까? 저는 박자를 무시하는 편입니다. 어떤 땐 박자가 아예 없지요. (노래 부르며) 하야~안 꽃, 찔레~꼬~옻~. 박수를 칠 구멍도 없지유. 판소리 ‘아니리’(공연자가 장단이 없이 말로 연기하는 것)에 해당하는 노래도 있습니다. ‘어머니 지금 뭐 허신대유/ 아, 솔잎은 뿌려서 뭐 허신대유’(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꽃구경’의 일부분)가 그렇지요. 저는 대중음악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고 자부합니다. 국악과 민요를 차용하고, 연극적인 요소도 넣어 가요의 평면성을 넘어섰지요. 대중가요는 우리네 민요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건데, 그걸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 것이지요.”

43세까지 열댓 가지 직업을 전전하던 오랜 기간 동안 장씨는 거의 웃지 않았다. 가수 데뷔 이후엔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에 나와 이 길이 내 길이구나, 그렇게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저는 복 받은 인생이지유.”

“조용히 해요, 조용히! 새들이 깨지 않소” 

Q 하긴 일반의 예상을 깨는 호흡이 ‘장사익 소리’의 특징이자 강점입니다.

A “자연 현상과 마찬가진 거지요. 날짜대로 봄이 오는 게 아니잖아유. 높고 낮게[高低], 길고 짧게[長短], 세고 여리게[强弱], 물 흐르듯 정취를 맡기는 거지유. 자연스런 호흡과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노래가 됩니다.”

홍대 소극장 대박을 터뜨린 이듬해 장사익은 1집 <하늘 가는 길>을 발매하며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찔레꽃’, ‘봄비’, ‘님은 먼 곳에’ 등이 실린 이 음반으로 장사익은 평론가들로부터 ‘가장 한국적으로 노래하는 소리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Q ‘찔레꽃’이 그러하듯 노래 가사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듯합니다. 시에 곡을 붙인 경우도 많구요.

A “가사가 노래에 긴 생명력을 주지요. ‘찔레꽃’은 제가 밑바닥 생활을 할 때 길가에 핀 찔레꽃을 우연히 발견하고 지은 노래지유.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가난하고 소외받은 나 같은 존재들을 위해 쓴 가사지유. 나도 시를 쓰고 싶지만 공부가 짧아 다른 시인들의 시어를 빌려다 내 노래로 만듭니다.”

그의 노래 중엔 기존 가수들이 발표했던 곡을 리메이크한 것들도 많다. 그는 박자를 파괴한 긴 호흡으로 새로운 ‘장사익 노래’로 만들어 낸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되는 ‘희망가’ 변주가 그랬듯 옛날 노래도 나름대로 해체시키고 변형시킵니다. 이미자 선생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동백아가씨’)하고 똑떨어지게 부르지만 나는 엿가락처럼 완전히 늘여서 부르지요. ‘헤~~이이~ㄹ’, 이렇게 부르면 마치 동양화의 여백처럼 느림 속에서도 꽉 차게 되지요. ‘헤’자 하나에 사계절이 다 들어가 있시유.”

동양화 얘기도 나왔지만 그는 무대에서 한복, 두루마기를 고집한다. 2015년 3월에 열린 KBS 창사 42주년 ‘이미자-장사익 특별 콘서트’에서는 생전 처음 턱시도 차림으로 등장했다가 이미자 다음으로 차례가 왔을 때엔 예의 두루마기로 갈아입고 무대에 섰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산에서 목소리를 다듬는 것이 어느덧 일상이 된 그가 2000년 어느 날 자택 뒷산에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배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커다란 소리를 질러댔다. “아~야~오~.” 새벽 5시였다. 
여명의 정적(靜寂)을 깬 소리가 산을 넘어 이리저리 흩어지며 메아리쳐 되돌아 왔고, 그는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군.’ 그때 갑자기 등 뒤쪽에서 버럭, 호통이 들렸다. 
“조용히 해요, 조용히! 새들이 깨지 않소.” 
나이 지긋한 목소리가 벼락처럼 장사익을 내리쳤다. 

“아차, 싶었지유.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새벽 소리 연습이 새들의 단잠을 방해하리라곤 상상조차 못 해봤으니까.” 

이제껏 내 소리가 산천초목과 짐승들의 고된 휴식을 깨는 괴성(!)이었다니…. 
이후 그는 산에서 목청을 돋우는 따위는 일절 금하고 있다. 사진작가가 빛에 민감하듯, 소믈리에가 향기에 가장 예민하듯, 음악인은 무엇보다 소리에 조응(照應)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소리가 누군가에겐 애절(哀切)이지만, 어떤 이에겐 소음(騷音)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여러 소리들에 지쳐 있을 법도 한데 그의 집 마당은 나지막한 음악 소리로 가득하다. ‘지나다 잠시 머무는 새와 바람, 구름을 위해’ FM 라디오를 틀어놓았다고 한다.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1년 365일 그는 소리와 ‘더불어’ 살고 있는 셈이다.

장씨는 순전히 독학으로 한글 서예를 익혀 10여년 만에 ‘장사익 체’의 경지에 올랐다. 디자이너 이상봉이 그의 한글흘림체 글씨 문양을 입힌 의상을 만들기도 했다.

Q 무식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장사익 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목, 가슴, 배, 아니면 온몸입니까? 노래 부를 때 항상 앞뒤로 살랑살랑 율동을 하시던데요.

A “국악은 목에서 소리가 나오는데 저의 경우는 몸 전체에서 소리를 짜서 내지요. 어떤 땐 노래 부르다가 발에서 쥐가 나기도 합니다. 후반부 클라이맥스 부분을 부를 땐 눈앞에서 별이 번쩍번쩍 거려요. 아차, 하고 정신 줄 놓으면 쓰러지게 되지요.”

‘토해낸다’는 표현이 정확히 어울리는 그의 소리는 한 번 들으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흡인력이 강하다. 그의 음반은 대부분 최소한의 반주를 사용한다. 절창 ‘님은 먼 곳에’의 경우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북[鼓]만으로 마치 오케스트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그의 목소리가 가진 힘 덕분이다. 오디오 마니아들이 고가의 앰프와 스피커를 고를 때 보이스 출력 상태 체크를 장사익의 음반으로 하고 있는 건 음향기기에 큰돈을 써본 이들은 다 아는 얘기다.

Q 그런 식으로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부르면 목에 무리가 가지 않나요?

A “부담이 가지유. 에너지를 엄청나게 쏟아야 하니까. 지금까지는 가성을 쓴 적이 없는데, 70 넘으면 써야 것시유(웃음). 플라시도 도밍고가 테너 하다가 바리톤으로 내려가는 이유를 알겠다니께.”

사진 6: “꽃이 피는 시기가 다 다르지유. 개나리는 2~4월에 꽃이 잎보다 먼저 필 정도로 성격이 급해요. 목련도 그렇고. 국화는 넘들 다 필 때 버티고 기다리다가 가을 느지막이 찬 서리 내릴 때 핀단 말이지. 사람도 분명 제 꽃을 피울 시기가 따로 있다는 거지유.” 

“박영석 대장이 고봉 오를 때 그랬듯이 
저 역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 거예요”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장사익은 아들 둘을 뒀는데 전형적인 국악 가족을 이루고 있다. 대금을 부는 두 아들은 국립극장과 정동극장 단원이고, 큰며느리는 가야금 연주자, 둘째 며느리는 한국무용 전공자다.
2015년 9월 그의 고향에서 열린 ‘홍성역사인물축제’에서 공연할 때는 안산시립국악단이 반주를 했다. 당시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보면 공연 중반에 그가 “이 무대에 제 손주 어매가 있시유. 얘야, 일어나봐”하며 며느리를 소개시킨 뒤, “며느리랑 이렇게 함께 노래 부르니 좋네유”라며 활짝 웃는 장면이 나온다. 부러울 따름이다.

Q 장사익 소리에서 절절함이 묻어나고, 그 노래들을 통해 아픔을 치유한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A “제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까 사회에 잘 적응을 못 하는 분들이 많아유(웃음). 내가 경험해 온 것이 많다 보니 나름대로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제법 있다는 거겠지요. 베토벤의 ‘운명’을 들으면 이게 과연 인간이 만든 것일까, 싶지 않나요?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음악은 사람들을 맑게 하고, 아름답게 하지유. 우리들에게 위안을 주고, 살아갈 힘도 주고.”

Q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신년 계획은 무엇인가요?

A “세상에 나와서 이 길이 내 길이구나, 그렇게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저는 복 받은 인생입니다. 노래를 통해 남들을 즐겁게 하고 나 또한 즐겁고. 해가 바뀌었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유. 오늘 하루가 미래의 주춧돌이라고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정말 중요합니다. 산악인 박영석씨를 죽기 서너 달 전 이 자리에서 봤지유. 말도 별로 없이 조용히 앉아 있던 그가 그럽디다. ‘8,000m가 넘는 고봉을 오를 때 목표는 정상에 두지만 산행 자체는 바로 코앞만 보면서 하는 겁니다. 고작 1m 가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그래왔듯 꿈과 목표를 갖고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사는 거지요.”

‘지당한 말씀’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울림이 다르다. 식솔을 거느린 가장으로 43세에 날라리를 불겠다며 직장을 나온 남자, 늦깎이로 소망을 실현해 1주일에 2회꼴로 2시간 20분짜리 공연을 한다는 남자가 “다만 오늘 성실히 살아갈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창밖으로 그가 만든 풍경(風磬)이 울고, 새 한 마리 푸르륵 날았다.

(출처 | 조선일보 월간 산 2016년 1월호. 
글 |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기획취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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