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노력 영웅 김병화 박물관

강한 생명력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은 러시아내 소수민족 중 성공한 민족으로 다시 일어선다. ‘조국을 찾겠노라 말달리던 선구자들’이 자유시에서 주도권 싸움으로 붉은 군대에게 3천명 이상 목숨을 잃고 지리멸렬되었다. 안타깝게도 독립군 주력 부대가 여기서 섬멸되었다. 만주 방면에서는 잔여 독립군이 계속 활동을 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한인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그 곳에서 안정을 찾고 평온기를 맞이한다. 고려인은 고향을 잃은 설움과 추위, 배고픔의 고통 속에서도 인구가 55만 명으로 늘어난다. 고려인 촌을 방문한 프르제발스키는 “고려인은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부지런한 민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선 개인의 부농화를 묵인하지 않는다. 농업은 점차 꼴호즈(집단농장) 중심으로 바뀌었다. 부지런하고 겸손한 고려인은 농업능력이 뛰어나다. 김병화 농장, 황만금 농장은 집단농장 중 소련에서 가장 우수한 농장들이었다. 외국 귀빈이 오면 이 곳을 시찰하게 했다 

그러나 고려인들에게는 시련을 딛고 일어서면 또 다른 시련이 닥쳐오기만 했다. 고르바초프 시절 소련연방이 해체된 후 중앙아시아 5개 회교민족인 우즈베크, 카자흐, 키르키스, 타지크, 투르크멘 공화국들은 자기네 국어를 쓰고 회교민족주의를 내세우며 ‘탈(脫) 러시아 운동’을 벌였다. 이민족 배척, 추방운동이 활발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곳에 사는 고려인은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동포들이 연해주로 돌아가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1989년 러시아가 제정한 민족정책강령에 의거해 고려인들은 자치구 성립을 해보려고 노력하였다. 러시아최고회의는 1993년 재(在)러시아 고려인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을 통과시킨다. 강제이주는 불법, 범죄적 조치로 인정하여 한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이전 거주지로 귀환할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연해주는 고려인이 발 뻗을 곳이 거의 없어졌다. 한인들 사이에는 자치주를 연해주에 만들자는 의견과 중앙아시아에 두자는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한다.

새로운 정착지 볼고그라드

그동안 흑해와 카스피해 중, 상변에 위치하고 있는 볼고그라드(Volgograd)에 고려인 사회가 조성되어 왔다. 볼고그라드 주는 남한보다 약간 크다. 볼가강과 돈강이 교차 하는 곳이라 땅도 비옥하다. 100개 이상의 소수민족이 살며 인구는 270만 명이다. 볼고그라드 시 100만 명, 볼스키 시에 40만 명이 있다. 2차 대전시 이름은 스탈린 그라드였다. 200일 전투로 나치 독일의 주력부대를 꺾은 곳이다. 히틀러의 독일은 여기서부터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 그래서 영웅도시 칭호를 받았다.
 
이곳에 5만 여명의 고려인들이 고본질농업(계절농업)을 주로 하고있다. 고려인 사회는 우리 옛말의 보고(寶庫)이다. 육진말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다. 
“증조부모 산소는 한국에, 조부모 산소는 연해주에, 부모 산소는 중앙아시아에, 자신들 묘는 볼고그라드에, 그러면 자식들의 묘는 어디에?” 볼고그라드에서 역사의 굴곡이 자기네 운명에 그대로 반영된 고려인의 한탄이다. 

<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회>
한국내에서 강제이주 80회를 맞는 세미나, 전시회, 공연 등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 중에서 눈길을 끈 것은 함세웅 신부와 이부영 전 의원이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회'의 공동대회장을 맡아 지난 23일과 24일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유적을 답사한 뒤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 - 회상열차'에 몸을 싣고 1937년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끌려갔던 수난의 길을 따라갔다 온 일이다. 필자도 여기에 동승하려고 참가신청을 해 두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못가고 말았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크스탄의 알마티까지 6,500km의 긴 열차 여행을 함으로써 당시 동포들이 겪었던 아픈 과거를 체험하고 다녀왔다. 

함세웅 신부는 전라도 광주에 있는 고려인촌에 찾아가서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처럼 혹독한 고난을 겪었는지는 상세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강제이주 후 어렵사리 터전을 다시 일구고 자리를 잡았다가 소련 해체 후 중앙아시아 독립국가들의 민족주의 발흥으로 또 다시 핍박을 당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던 모국으로 귀환했는데도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타깝고 참담한 심경입니다" 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한 고려인에게 “왜 한국에 왔느냐?”고 물으니까 “어머니 나라니까요” 라고 대답했다. 함신부 글 제목에 "속죄의 심정으로 순례길 동참", "조국이 어머니 품으로 맞아야" 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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