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위해 극한상황 견뎌”
지인들, 교회 신자들 큰 도움
영주권 해결, 이혼으로 ‘폭력의 굴레’ 벗어나 

한호일보는 3회에 걸쳐 한인가정의 폭력실태를 싣는다.  “한인 등 아시안 이민자 가정은 쉬쉬하며 외부의 도움을 꺼려하는 문화때문에 가정폭력 문제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또한 너무 심각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은 오히려 신고조차 못 한다고 한다.  첫 회 사례(3월 16일자 게재)에 이어 이번 주는  50대 동포 여성 B씨의 사례를 소개한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용기있게 공개하는 배경에는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다음 주 3회(3월 30일자 게재 예정)는 변호사 및 상담가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과 가정폭력 발생 시 대처법, 호주  보호기관 안내 등에 대한 내용이 소개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註) 

지난 주 동포 주부의 가정폭력 기사가 나간 이후  여러 건의 제보를 접수했다. 그 중 인터뷰에 응한 50대 초반의  B씨를 만나 그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이혼한 지 5년이 지났고 남편은 더 이상 호주에 있지 않다. 그리고 자신을 견디게 한 네 명의 자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서 약 10년의 결혼 생활동안 심각한 가정폭력을 경험한 B씨는  관광비자로 세 아이를 데리고 호주에 지난 2007년 입국했다. 친정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평생을 지낸 어머니의 삶이 그대로 자신에게도 이어진다는 사실이  기가막혔지만 그녀 역시 이혼은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우선  남편과 좀 떨어져 지내고 싶다는 생각에 호주행을 선택했으나 남편은 그녀가 호주에 입국한 지 얼마 안 되어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호주로 입국했다.

폭력은 호주에 와서 더 심한 형태로 이어졌다.  남편은 언어문제 등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가운데서 일은 하지않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B씨에게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했다. 
폭력은 늘 매우 사소한 이유로 시작됐다. 술 기운에라도 그렇게 핍박을 가했다면 그래도 덜 억울하겠지만 평소 술을 입에 대지않는 가운데서 폭력을 행사한 것을 보면 남편은 성격장애자나 정신질환자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어렸을 떄부터 자신만을  받들어주는 환경 속에 성장한 남편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울분 또 이민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좌절감 등을 아내에게 폭력으로 쏟아부었다. 
“듣지못할 말, 겪지못할 일을 겪으며 마치 동물처럼 산 것 같다. 옷 벗으라면 벗고... 남편의 욕구에 따라 응해야 했다. 
잘 곳도 남편이 정해주는대로 자야 했기에 골방에서 자는 날도 많았다.  자존감은 낮아졌고 늘 ‘네가 잘못했다!”고 하니 정말 그런가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
성경책을 불태우고 교회를 못나가게 했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텼다.

폭력의 도구 역시 다양했다. 골프채, 가위, 몽둥이, 삽 등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남편은 무엇으로 먼저 맞을 것인지 ‘선택권(?)’을 주었다.  먼저 주먹질부터 시작되었고 다양한 도구들이 동원됐다. 심지어 가위로 입을 찌른 적도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살면서 목매고 죽을까라는 자살충동도 많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세차장, 청소 등 안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다 임대비를 못내 집에서 쫒겨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지인들과 목사님, 교회 신자 등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한동안 불법체류 신분이었기 때문에 호주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는 엄두를 내지 못했고 한 두번 상담기관에 전화를 했지만 내 상황이 안정적이지 않아서였는지 그리 큰 도움은 되지 못 했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남편의 폭력이 한바탕 지나간 후 골방에서 자던 어느 날이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당시 초등학생이던 막내의 학교 기록이 담긴 라면 박스와 당장 필요한 것들을 챙겨 자는 아이들을 깨워 뛰쳐나왔다. 그 뒤로 숨어지내며 결국 우여곡절 끝에 남편과 이혼을 하게됐다. 공항에서 다시는 호주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남편은 호주를 떠났다. 이제 살았구나! 

이십여 년의 세월, 그런 극한 상황을 그녀는 어떻게 견뎠을까?

“부모가 이렇다고 애들까지 불행한 삶을 살게해서는 안된다, 애들은 나처럼 살면 안되며 애들한테는 행복하게 살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기억나는 어느 날 밤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아들을 옆에 태우고 청소를 하러가던 중 너무 졸려서 길거리에 차를 세우고 쪽잠을 잤다. 몇년 후 그런 날들이 생각나 아들에게 “깜깜한 밤에 엄마가 자버렸으니 우리 아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린 너를 두고 잔 것이 생각나 엄마가  미안하네”

그랬더니 아들이 하는 말, “엄마 미안해하지 마세요.  엄마가 옆에 있는데 머가 무서워. 하나도 안 무서웠어요”.

그 어린 아들은  청소를 거들면서 통에 물을 엄마가 들 수 있을만큼만 갖다주었다. 너무 많이 갖다주면 엄마가 물을 옮기면서 너무 무거워 힘들거라는 생각에서였다. 

B씨는 아이들은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엄마가 그렇게 살아온 것을 ‘안다’고 했다.  고운 여자로, 아름다운 여자로 살지는 못했지만 술 먹지않고 도박 안하고 도망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것 밖에 없는 엄마를 ‘기억한다’고 했다.  
“하나님! 새끼 굶기지 않고, 집 쫒겨나지 않고 어미로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기도로 버텼던 그 시절, 어미로서의 그 본능만이 있었던, ‘동물같은 삶이었다’고 그녀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표현했다.

어려울 때마다 도움의 손길이 열렸다. 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이 작은 교회로 옮기라고 했는데 영문을 모른 채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옮겼다. 되돌아 생각해보니 탈출한 이후 교회며 지인들을 다 쑤시며 가족의 행방을 찾던 남편의 눈으로부터 자신들을 작고작은 교회에 숨겨주신 하나님의 섭리였다. 꿈에서도 나타난 남편은 내 눈에는 보였지만 남편은 나를 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영주권이 없어 학교에 못간 적도 있었고 대학을 바로 들어가지 못하기도 했었지만 기적적인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영주권을 획득했다. 상상할 수 없는 가시밭길 위에서 자란 네 자녀는 “다 엄마 덕이에요.  사랑해! 감사해요”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나의 삶은 그렇다치고 자식 인생까지 망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애들 앞날은 지켜주고 싶었다.  부모가 된 이상 죽는 날까지 ‘나의 사생활은 없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도 아니고 가방끈이 긴 것도 아니다. 되돌아보니  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같은 상황이 와도 나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제 함께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그냥 넘어가지 않고 솔직하게 대화하기, 억울한 상황을 기록하기 등을 통해 자칫 여자로서 아시안인으로서 당할 억울함 등을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다.  마음이 놓인다. “아, 저렇게 서로 의지하며 살겠구나!”

먹고살 것이 걱정될 때는 먹고 사는 것이, 영주권이 필요할 때는 영주권 얻는 일이, 이제  먹고살 것이 해결된 후 정신적인 후유증이 닥쳐옴을 느낀다. 다행히 아이들은 엄마의 희생을 고맙게 생각하고 건강히 잘 자라주었지만 아이들이라고 왜 상처가 없겠는가? 부모로부터 좋은 관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것을 목격한다 .

이혼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그녀가 이제 남편의 폭압에서 벗어났다. 과연 그녀는 이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혼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기보다는 아이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한 부모일지라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주는 안정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 또 남편도 가족과 떨어져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더구나 이혼은 안된다하면서 위험한 상황을 그대로 둔다면 누군가 죽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나 하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남편 살인자 만들고 애들은 고아되고 모두가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맞는 상황은 벗어나 폭력의 쇠사슬을 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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