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엔 한국에서 온 지인들과 함께 멜번을 방문했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었으나 그 곳에서 사는 분의 주선으로 짬지게 여러 군데를 둘러 보았다. 그 분은 본인과 부산에서 온 일행 중 한 사람과도 잘 아는 사이였으며 나머지 두 사람과도 간접적으로 서로간에 전화로 인사를 나눈 편안한 관계였다. 그래서 숙소와 가이드 등의 주선을 해주는 상당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 오가며 한 말 중에 “나도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곧 일선에서 물러나고 젊은 승려를 후임자로 초청을 준비 중이다”하면서 단데농 등 한가한 숲속 동네의 렌트비를 물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후 6월 달엔 한국에서 온 도반 스님과 함께 20 여 일간 뉴질랜드 남,북섬에 있는 3 군데의 한국 사찰과 대만, 태국, 스리랑카와 키위가 운영하고 있는 오클랜드의 명상 센터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 이튿날 저녁에 멜번에 살고 있는 그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마자 근래에 이곳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자신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는 것이다. 기후 스님이 정법사 주지를 그만두게 되면 멜번에 와서 살려고 하며 그 일의 주선을 본인이 앞장서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라고 하였다. 

며칠 전 종파가 다른 불교 사찰의 회장이 저녁을 같이 하자면서 초대한 자리에서 그런 하소연을 하면서 나이가 들면 있던 곳에 가만이 있을 일이지 뉴질랜드까지 가서 이 절 저 절을 돌아다니면서 훼방을 놓고 있다면서 크게 못 마땅한 말을 했다고 큰 걱정을 했다. 

그것에 대해서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끝머리에 이르러 “스님이 여기에 안 오시는 거지요?” 를 두번이나 반복해 물으면서 나의 확답을 받으려 애썼다. 그 곳 산속의 공기가 좋게 느껴져서 지나가는 말로 물어본 것이니 개의치 말라고 하면서 대화를 끝냈다. 

이튿날 아침에 또 다른 이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이는 시드니의 사찰에 다니다가 멜번으로 이사를 간터라 본인과도 잘 알아서 마음 놓고 그 쪽의 분위기를 전해주었다. 그이 역시 내가 멜번에 가지 않는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전화를 끊었다. 그런 뒤 일주일이 지난 후에 이번엔 서울에 사는 아는 비구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멜번에서 3년간 영어공부를 한 적이 있어서 3월에 신세를 진 그이와 가끔씩 대화를 나누고 지내는 그런 사이였다. 한참동안 주변의 얘길 나누다가 핵심은 역시 멜번의 그 분에게로 돌아갔다. 30여 분 동안 긴 통화에서 전하고 싶었던 분명한 내용이 있었다. 

이젠 제발 시드니에 온 승려나 신도들을 자신에게 소개하는 일을 그만 두었으면 하는 우회적 전달이었다. 저간의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서 자세히 새겨 듣고 보니 미소와 친절 속에 상당한 불편함이 내재되어 있었고 그 포인트는 쌈지가 가벼워짐에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안 오시는 거지요?” 란 말 속엔 시드니에 온 손님을 자신과 연결하지 말아 달라는 뜻도 함께 담긴 복합적인 말일 수도 있었는데도 멍청한 본인이 그 속 뜻을 잘 이해를 못 한 듯해서 다시 서울로 전화를 한 듯 하였다. 

본인도 이곳에 오래 살게 되면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가능한한 상대에게 물적, 심적으로 부담을 덜 주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나 간접적으로 그런 얘길 듣고 보니 민망스러웠다. 이제 잘 알았다고 하면서 대화를 끝낼 무렵에 그 비구니가 “스님 올해 연세가 얼마지요?” 하면서 불쑥 내 나이를 묻는 것이었다. 

자세히 듣고 보니 이제 그 정도로 세상을 살았으면 나이값을 좀 해서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멈췄으면 하는 뜻으로 이해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통화를 끝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가치를 결정함에 애매모호한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나이값에 버금가는 언행의 적정한 태도의 가름 또한 매우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나이값을 하라”는 말의 뜻은 대부분은 이해를 한다. 그러나 실천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나이값의 요구는 대개는 젊은이나 약자쪽에 있는 사람들이 손윗 사람들에게 못마땅함을 표현하는 대명사이다.)  

나이를 셈하는 오랜 시간은 많은 경혐과의 동의어이다. 자신이 겪어온 삶의 고락과 애증의 감정을 지혜롭게 바라보아서 그것을 상대방에게 전이시켜보면 나이값을 하게 되는 묘수가 그 속에서 나와진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눈과 귀와 마음의 정보가 바깥으로 잘 흘러서 상대방의 나이값에 대한 평가는 쉽고 빠르게 하는데 자신의 그것을 바라보는 내면의 눈은 감아 버리기가 일쑤이다. 그래서 나이값을 못하게 되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身老而心不老)는 옛 말이 있다. 모습의 나이와 이성(理性)의 나이에서 나와지는 그 나이값을 어느 정도로 산정해야 될지는 최저 임금을 정하는 일보다도 더 어렵다. 

어느 유행가는 가사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숫자 역시 기호이며 인간만이 이해하는 하나의 암호일 뿐이다. 결국은 관념이 만들어 내 허상에 집착하고 따지는 일이다. 그렇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값에 대한 그 어떤 태도 또한 적용되는 것도 사실이고 보면 이래 저래 나이드는 것이 조심스럽다. 

그러나 참 생명엔 본래 나이가 없다. 원래는 불생불멸인데 인연따라 태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그냥 본래 자리로 되돌아 가니 그러하다.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진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그들은 언제나 드넓은 바닷물에서 바람의 작용으로 일시적으로 일고 있는 현상과 똑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붓다는 무상한 현상적 나이에서 불생불멸의 영원의 나이를 음미할 때라야 참 행복을 느낀다고 설파하셨다. 근세의 대선지식이였던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스님은 누구나가 연세를 물으면 앞뒤가 여덟이라고 대답하셨다. 8 x 8속에 숨어있는 그 도인분의 연세는 정작 얼마이며 그 분의 나이값을 어느 정도로 산정해야 옳을 것인가? 영원의 자비와 가없는 사랑으로 이어진 진리적 나이값을 못할 바에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고 있는 인연있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나이값에 버금가는 언행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살아 가도록 노력해야 되는 시점에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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