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 초 멜번에서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 또는 극우주의자들의 야외 집회가 열린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5일(토) 약 100여명이 멜번 세인트 킬다(St Kilda) 비치에서 반 이민 집회를 가졌다. 극우주의 행동가들인 닐 에릭슨(Neil Erikson)과 블레어 코트렐(Blair Cottrell)이 주관한 이 행사는 ‘세인트 킬다 탈환 시위(Reclaim St Kilda rally)’라는 도발적인 타이틀이 붙었다.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나치 경례’를 하고 이민 중단과 인종차별적 구호를 외쳤다. 이런 행사에 무소속의 프레이저 애닝 연방상원의원이 참석해 지지 연설을 하자 호주 정치권이 대부분 그를 규탄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더 많은(약 200명) 시민들이 반인종차별 시위를 했다. 이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환영하지 않는다’는 플랭카드를 들고 규탄 시위를 했다. 빅토리아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 양측의 충돌을 방지했고 별 소동 없이 행사가 끝났다.   

이같은 극우주의자들의 정치성 집회에는 어김없이 호주 국기가 등장한다. 호주 국기를 몸에 휘감는 일부 참석자들의 행태는 “우리(백인들, 유럽계)가 호주의 주인이며 이민자들은 환영받지 못 한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민자 입장에서는 볼썽사나울 수 밖에 없다. 

연초 집회 후 2-3주 지나면 1월 26일(오스트레일리아데이)이 된다. 이날은 호주에서 미약한 내셔날리즘(nationalism)이 활개를 치는 날이다. 전국 곳곳에서 백인(유럽계) 청소년들이 호주 국기를 휘감고 길거리를 활보하며 이민 반대 구호를 외치는 등 ‘다분히 극우성향 행태’가 두드러지는 날이기도 하다. 오스트레일리아데이의 진정한 의미가 변질됐고 호주 국기가 극우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된 것같아 씁쓸한 느낌이 든다.

이와 관련, 빌 쇼튼 연방 야당 대표는 “연초 보수주의자들의 연례 야외 집회가 열리는데 오스트레일리아데이를 단골 정치 소재로 다룬다. 그들의 지지 근거를 만족스럽게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 날을 활용한다”고 지적하고 “모리슨 정부가 시민권 수여식 의무화로 카운슬을 압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몇 년 전 멜번의 야라 등 일부 카운슬들이 1월 26일은 원주민에게 침략과 고통의 날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점을 존중하며 이날 시민권 수여식을 거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같은 움직임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또 한편으로 국민 여론을 앞세워 오스트레일리아데이의 의미 격하를 방지하기 위해 모리슨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데이 규정을 강화하겠다고 이번 주 밝혔다. 지자체에서 시민권 수여식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겠다는 목적도 있다. 물론 총선을 염두에 둔 결정일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국민들 사이에 이 날이 호주의 건국일(national day) 의미가 있는 국경일로서 가장 적합한 날인지 여부에 대해 이제는 정부 주관으로 허심탄회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백인 다수의 뜻을 그대로 반영한 뻔한 설문조사(어드반스 오스트레일리아 의뢰) 결과를 반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안에서 원주민을 배제하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범국민적인 통합이 될 수 없다. 피해자 그룹인 원주민들을 진정 포용할 수 있는 대안을 정치 지도자들이 제시하고 국민들의 난상토론을 거쳐 합리적인 결론을 내야 한다. 그런 민주주의 과정 없이 규정 강화만으로 오스트레일리아데이의 진정한 의미를 강조하기 어려울 것이다. 호주는 아직도 헌법에 원주민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나라다. 선진국답지 못한 행태를 벗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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