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에 한국에서 알고 지냈던 젊은 목수를 초청했다. 그는 한옥만을 전문적으로 짓는 매우 성실한 청년으로 소문이 나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살았던 봉화 구마동(九馬洞) 산골에 도리천(桃梨天)이라는 이름의 작은 토담집을 지은 이가 바로 그이였다. 

어느날 지인들과 함께 안동 도산서원에 들렸을 때 퇴계 선생님이 글을 읽으며 지냈다는 작은 집을 둘러 보니 내 마음에 쏙 들었다. 7 평반의 그 집은 거무스름한 툇마루와 작은 골방 하나, 그리고 부엌이 전부였다. 작은 방엔 빗살무늬로 만들어진 광창(光窓)문이 달려 있었고 부엌문 역시 두 쪽의 나무문을 만들어서 빗장을 걸어 두었다. 걸망 하나만으로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문(沙門)의 살림살이엔 그 집이 안성맞춤이었다. 

따끈따끈한 온돌방 위엔 이불 등을 넣을 수 있는 벽장도 있었고 반들반들한 검은 솥 아궁이엔 장작을 피우고 난 잿불더미에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정감어린 그런 옛정이 깃든 참한 구조였다. 나도 언젠가 이런 집을 지어서 퇴계 흉내라도 내어 봐야지 하고 마음속에 그 염원을 꼭꼭 담고 있다가 일년 뒤에 태백산 구마동에서 50리를 더 들어가는 심심(深深)산골, 전기도 없는 그 곳에 어떤 분의 땅에 집을 지어도 좋다는 인연이 와 닿았다. 그 때 그 목수와 함께 도산서원에 가서 이 집과 똑같은 크기와 구조로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한 얼마 후 전통 기와를 올려 지은 도리천이라는 이름의 아담한 한옥이 그 곳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신발장 윗 추녀 안쪽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별명을 지닌 오래된 주목(朱木)나무를 구해서 그 지방에서 서예를 제일 잘 한다는 이에게 도리천을 직접 쓰고 파서 그 지역 면장과 현장에 와서 달아주는 그런 기회도 가졌다. 도리천이라는 이름은 금강경 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나오는 문구로 도홍이백춘자청(桃紅梨白春自青)의 줄임말로써 복숭아 꽃은 붉고 배꽃은 희고 봄풀은 푸르더라고 하는 뜻으로 자연과 함께 편안하게 생활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란 그런 뜻으로 읽힌다. 

그 때 그 집을 너무나 내 맘에 들게 잘 지어준 인연이 이곳 호주까지 초청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정법사에도 그럴듯한 8각 정자를 지어보고 싶은 정자 귀신이 나의 마음을 부추긴 것이다. 아마도 전생에 참외나 수박 농사를 지으면서 원두막에 올라가서 낮잠을 많이 잔 그런 습성이 있었던지 조금 오래 산 곳마다 정자를 짓곤 하였다. 그 시작은 통도사 서운암이였다. 뒷산 청룡 왼쪽 자락 언덕배기에 고목과 고목 사이에 대나무를 단단하게 엮어 만든 특이한 모습의 정자를 만들어서 신선대(神仙台)라 이름지었다. 폭염이 쏟아지는 중복(中伏) 무렵에 그 곳에 올라가서 병풍처럼 둘러쳐진 영축산 푸른 숲을 바라보노라면 더위는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다. 대나무의 찬 기운과 영산의 선들 바람에 그 독한 열기도 앉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경주 기림사 북암(北菴)이다. 그 곳에서 6년을 지내는 동안 냇가 근처 작은 동산에 초가 지붕으로 원두막을 지어놓고 월하당이라는 간판을 붙였다. 그 주변엔 달맞이 꽃이 매우 많아서 달빛을 바라보며 피어나는 그들의 노란 꽃모습이 월하미인(月下美人)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보름을 전후한 여름 달밤에 그 곳에 올라가서 저 먼 산넘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련한 소쩍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살아 있음에 대한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 뒤에 한국에서 제일 깊은 산골짝을 찾아나선 곳이 바로 태백산 구마동이었다. 짓다만 빈 집을 하나 얻어 스레트 위에 이엉을 올려 초가로 만들고 허물어진 돌담을 쌓아 올려 굴피(참나무 껍질)를 올리는 멋스러움을 부렸다. 게다가 뒷산 고목 금강송 뿌리에서 졸졸졸 흘러 내려오는 옹달샘에 소나무 홈대를 연이어서 그 약수가 흐르게 하고 그 곁에 또 하나의 정자를 짓기로 하였다. 소 마굿간이나 지었던 최씨라는 이가 나도 잘 지을 수 있다며 큰 소리치기에 맡겼더니 그 모습이 삐딱하니 이상하게 되었다. 한참을 바라본 끝에 그 이름은 취선당(醉仙堂)이라고 하기로 했다. 술취한 신선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의미이다. 

그 후에 그곳에서 20 Km 더 깊은 곳에서 살게 되면서 도리천이라는 한옥을 짓게 되었다. 그곳에선 봉화 복수박(크기가 작고 매우 달다)을 국도 변에서 내어 놓고 팔던 이가 영주로 이사를 가면서 나에게 그냥 가져가라고 하였다. 그것을 해체해서 싣고 와서 다시 조립하니 멋진 원두막이 되었다. 그것의 이름은 망춘정(望春亭)이었다. 소대한엔 영하 20도의 혹한이라 봄을 기다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한국에선 마지막이 된 정자 귀신이었다. 

정법사 뒷뜰엔 원주민들이 즐겨 따 먹었다는 빨간 열매가 달리는 닐리필리라는 특이한 나무가 있다. 그 나무를 중심으로 8각정을 지어서 의자를 올려 두고 쉬어가도록 배려하고 싶었다. 정자는 생각보다도 더 멋지게 지어졌고 중간의 잎이 무성한 나무와 함께 쉼터로는 훤출한 공간이 되었다. 여기엔 8각정이라 이름하고 긴 나무판자에 붓으로 이렇게 써 두었다. “여기 한 그루의 소담스런 푸른 나무가 살아 숨쉬고 있음으로 봄이 오면 하얀 꽃들로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고 가을이 되면 앵두만한 붉은 열매가 맺어서 뭇 새들의 먹이가 되어주고 있으니 이 또한 자연이 제공해 주는 공덕의 향연이다” 그에 더해서 그들이 드리우는 두터운 그늘이 뭇 사람들을 불러 들여서 담소를 나누며 닫혔던 사랑과 감사의 진동(震動)을 배가(倍加)시키고 있으니 그 모두가 살아 있음에서 나오는 자연의 큰 덕화(德化)이리라. 이 곳에 작은 정자를 지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정담(情談)을 나누며 찰나(刹那)의 대화가 영원의 열락(悦樂)의 밑거름이 되길 희망해 본다. 

무릇 말이란 자신의 생각을 목소리로 전달하는 울림의 파장(波長)이다. 그 속엔 온갖 감정이 섞여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감사와 사랑이 함께 스민 말을 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큰 이익이 된다. 거기엔 조화와 평화의 기운이 가득하여 피차에게 진실의 공명(共鳴)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차지한 모든 분들이 자연이 주는 꽃 향기를 닮고 앵두색 마음씨에 촉촉히 물을 주게 되는 그런 싱그러운 정자가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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