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재외동포는 약 750만 명. 미국과 중국이 그 중 각 250만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중국에 비해 미국은 한국의 산업화 과정을 함께 체험한 세대가 주류를 이룬다. 거리는 멀어도 인적 물적 교류도 많고 정보 소통도 매우 원활하다. 문학에 있어서도 그 연대가 깊다. 미주(캐나다를 포함해) 한인사회에서는 한글을 매개로 한 한인문학이 주류적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장르적으로는 수필문학이 두드러진 지위를 형성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수필은 미주 한인문학에서 질과 양으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온 수필가 하정아(58)의 <허벅지>다. 
 
수필에는 특정 사물을 두고 그 의미를 칭송하는 이른 바 ‘예찬’류가 있다. 옛 교과서에서 보던 <청춘예찬>(민태원), <신록예찬>(이양하) 같은 게 바로 그렇다. 이런 것 말고도 하늘이나 나무나 바람이나 어머니나 어린이나 손이나 흙이나 하는 것들이 지닌 가치를 드러내는 데 주력하는 수필들도 넓은 의미로는 이에 속한다. 나태주의 같은 제목의 시에서 촉발된 이 수필은 그 대상이 허벅지다. 허벅지? 이게 무슨 글감이 되나? 드러내 놓고 말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대단한 비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이런 ‘야릇한’ 소재가 ‘예찬’될 수 있다니! 
이 수필은 허벅지가 지닌 그 야릇한 감각을 재현하는 것으로써 구축된다. 신체에서 무릎과 엉덩이 사이의 어정쩡한 부위를 차지하면서도 그 둘을 튼튼히 잇고,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생얼’로도 ‘상대를 향한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표시’할 줄 아는 ‘두 기둥’이 하정아의 특별한 언어감각으로 살아나 있다. 수필이 문학의 지위에서 운위될 수준이 되자면 궁극적으로는 문제가 빛나야 한다는 사실까지 다시 배운다.  - 박덕규(단국대 교수)
 
허벅지 - 나태주, < 허벅지 > 전문
 
당당함이여
향기로운 성전을 받들고 선
두 개의 튼튼한 기둥이여
 
가고 싶거든 
어디든 가거라
꿈꾸고 싶거든
무엇이든 꿈꾸라
 
그대 달콤한 
안식과 방황이여
드디어 쓰러진 안식이여
 
하정아 수필가가 즐겨 가는 미국 데스밸리 사막의 '자브라스키 포인트'.
발칙해지기로 마음먹는다. 이렇게 선정적인 시를 앞에 두고 마음이 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허벅지는 유방, 유두, 배꼽, 불두덩, 겨드랑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보다 훨씬 더 은근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우선 야박하지 않다. 단어 자체만으로도 푸지다. 직접적인 성 기관은 아니지만 사랑의 행위에서 간과할 수 없는 몸체이다. 겸손하게 두 팔 벌려 소중하고 은밀하고 ‘향기로운 성전’을 다소곳하게 ‘받들고 선’ 기관이다. 소우주라며 ‘향기로운 성전’ 위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단전보다 무척 따뜻한 정감이 느껴지는 부위다. 
달콤한 안식이 시각과 촉감에 연루된 것이라면 허벅지는 일등 공신이다. 무심한 척하면서 큰 몫을 한다. 자유자재로 촐싹거리며 움직이는 입이나 팔다리와는 달리 허벅지는 엉덩이와 무릎 사이에서 자신을 주장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내두르지도 못하는 수동적인 기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면적과 위치로 인하여 중요한 곳이다. ‘두 개의 튼튼한 기둥’ 허벅지가 없는 엉덩이나 무릎을 상상할 수 있는가.
허벅지는 눈이나 입술처럼 두드러진 표정은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에로틱한 부위이다. 사실 눈이나 입술은 눈가림이 많이 작용하는 곳이다. 화장술의 도움을 받아 터무니없이 높은 가치와 평가를 받는 곳이기도 하다. 허벅지는 그늘에서 아무런 장식도 화장도 하지 않고 타인의 이목과 찬사도 얻지 못한 채 ‘생얼’로, 있는 그대로, 진실된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선다. 
한 남자는 그랬다. 희고 푸짐한 두 허벅지 사이에 모가지를 끼우고 숨 막혀 죽는다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 한 번 잘했다. 멋을 아는 사내다. 허벅지와 모가지는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인가.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앞으로 전개될 숨 막히는 영상의 전조로서 오히려 다음에 이어질 상황보다 훨씬 더 다양한 상상을 하게 한다. 두 허벅지 사이에 잠금쇠처럼 모가지를 채워보라. 내 것이라는 안정감과 충만감이 구체적으로 느껴지리라. 꽉 조이는 두 허벅지 사이에 낀 모가지. 방황이 무엔가. 내일은 없다. 향기로운 안식과 달콤한 황홀이 있을 뿐이다. 지엄한 성전에 닿기 전에 거쳐야 할 웜웝(warm-up)의 필수 관문이다.
 
허벅지 근육이 발달한 여인네는 힘을 한 숨 죽여야 한다. 사내가 원한다고 정말로 저 세상으로 보내버릴 만큼 조여서는 안 된다. 살짝 맛만 보이다가 다시 데려와야 한다. 허벅지 사이에 모가지를 끼울 때마다 죽음을 경험하는 남자는 지상에서 천상의 기쁨을 맛본다. 허벅지는 갇히고 싶고 숨 막히는 경험을 하고 싶어하는 연인의 정직한 마음을 잘 안다. 
남녀 모두에게 공평한 기관이기도 하다. 유방과 젖꼭지의 효능이 거의 전무한 남성에게 그것은 상실과 허무와 쓸쓸한 패배의식을 심어주기 십상이다. 허벅지는 그 기능과 효능에 있어서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충동적이지 않고 담백해서 좋다. 섹스가 없어도 좋다. 쓰다듬기만 해도, 주물거리기만 해도, 손톱 끝으로 살살 긁어주기만 해도 좋다.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그 촉감으로 인해 양자가 충분히 만족스럽다. 
 
시인이 노래한 ‘쓰러진 허벅지’는 비스듬히 가로누운 여체를, - 시를 쓴 당사자가 남성이므로 무리한 상상은 아니리라 - 연상시킨다. 춥고 외롭고 방황하는 영혼을 끝없는 안식으로 안내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허벅지는 야누스적인 기관이다. 수동적인 기관이라고 했겠다. 천만의 말씀. 그것은 대낮 요조숙녀의 태를 입고 나란히 맞붙이고 앉아 있을 때 얘기다. 필요할 때는 사뭇 달라진다. 마음만 먹으면 눈이나 입 이상으로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곳이다. 인체에서 가장 길고 큰 근육의 힘을 조절하여 상대를 향한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표시한다. 적극적이면서도 우아하다. 직설적이지 않고 암시적이다. 
성 감대가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곳으로 알려진 입술이나 유방이나 질은 감질 나는 곳이다. 제2의 성기라 불릴 만큼 표정 많은 입술은 성애 기관이라 하기에는 노출이 심하고 오히려 다른 일 - 먹고 말하는 일 - 에 한눈을 파느라 바쁘다. 지조가 없다. 흥분으로 ‘뽈딱’ 선 젖꼭지나 도톰해진 질 근육일지라도 벅찬 감정 표현을 표현하기에는 야박하고 국부적이어서 함량 미달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허벅지는 애무에 진실하게 반응할 뿐만 아니라 사뭇 민감하다. 면적이 넉넉한 만큼 성감대도 풍부하게 고루 분포되어 있다. 허벅지의 성감대가 유난히 발달한 여인을 만나는 남성은 복이 많다. 허벅지에 철퍼덕 얼굴을 묻으면 온 몸의 솜털이 부스스 일어난다. 두 넓은 허벅지가 삽시간에 닭살처럼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그대는 본 적이 있는가. 입술과 유방에서 시작된 유희는 허벅지의 도움을 통해서만 ‘화려 찬란’한 마무리를 할 수 있다.
 
허벅지는 손으로 쓰다듬든 입술로 핥든 넉넉하게 받아주는 곳이다. 부드럽고 향기롭다. 세포세포마다 스민 투명한 물 내음이 아득한 천상으로 인도한다. 몸체에서 빠져나와 짧고 가늘게 매달린 남성의 성기는 기분에 따라 조석변이로 변하기도 하고 원하지 않은 때 시들기도 하여 믿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소갈머리 좁고 둔감한 여성의 질은 새침하게 토라지면 조금도 타협할 기미를 주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리지만, 허벅지는 이들과 비교하면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기관인가 말이다. 
 
타인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허벅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두 팔을 들 수 있겠다. 팔은 입술처럼 용도가 다양해서 성애를 위한 특별 기관이라고 불러주기가 민망하다. 아무나, 낯선 이에게도, 처음 만난 이에게도, 마음에 없는 이에게도 팔을 뻗어 보듬어주고 토닥여 준다. 특별한 감정없이 누구에게나 베풀 수 있는 사회적인 행동이다. 허벅지는 어떤가. 오직 구별된 사람에게만 열어주고 감촉을 허락하는 극히 제한된 구역이다. 공석에서 처음 만난 여성의 어깨를 두 팔로 끌어안고 그 이마나 볼에 입맞춤을 할 수 있을지언정,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거나 애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체학적으로 허벅지가 지니고 있는 힘의 근원을 캐 보자. 인체에서 가장 긴 뼈는 피머(femur), 대퇴골이다. 인체에서 가장 긴 근육은 대퇴골을 덮고 있는 사토리어스(sartorius)다. 피머와 사토리어스는 허벅지를 이루는 중심 뼈와 근육이다. 이 두 존재가 지니고 있는 파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사내들은 극히 가냘파 보이는 여자의 허벅지가 지닌 완강한 힘을 대면하고 몹시 당황한다. 두 무릎을 맞붙이고 두발을 어긋나게 하면 데드 볼트(dead bolt) 잠금장치에 맞먹는 자물쇠가 된다. 그렇게 붙은 무릎은 웬만한 사내일지라도 쉽게 나누지 못한다. 누운 자세일 때는 이 힘이 배가된다. 약한 여성이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신이 선물한 비밀 병기이다. 그러니까 두 무릎을 열었다면 사내가 완력으로 이룩한 성취라기보다는 포기든 허락이든 여성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싫은 사람 발로 차낼 때, 막상 차내는 것은 발이 아니라 허벅지의 힘이다. 발은 허벅지에서 나온 추진력에 대한 반사반응일 뿐, ‘튼튼한 기둥’ 허벅지가 후원해주어야지만 확실하게 거부 표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허벅지로 지금 당장 실험해보시라.
 
허벅지는 용도도 다양하다. 지친 연인의 얼굴을 올려놓고 쉬게 할 수 있다. 천상의 베개다. 삶에 지친 그대 남성이여, 사랑하는 여인의 허벅지에 피곤한 머리를 내려놓아 보아라. 슬며시 두 눈을 감고 머리카락을 쓸어주고 두피를 마사지해주는 부드러운 손가락을 음미해보아라. 평안함과 만족감이 샘물처럼 차오르리라. 그대,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을 얻지 못해 안타까운 남성이여, 슬픔과 괴로움에 눈물흘리는 여인의 머리를 그대의 허벅지에 얹고 베개처럼 튼튼히 받쳐주어 보라. 팔 베개와 비교할 수 없는 신뢰와 존경을 얻을 것이다. 그대는 결코 그 여인의 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허벅지는 견고한 gateway이다. ‘두개의 튼튼한 기둥’ 허벅지를 쓰러뜨릴 줄 아는 사람만이 트로이 목마처럼 견고한 성문을 열고 ‘향기로운 성전’에 입성할 수 있다. 더 ‘나아가고 싶은 곳’, 더 ‘오르고’ 싶은 것에 대한 꿈을 꿀 자격이 있다. 희망을 가늠하는 이정표인 셈이다.
 
허벅지를 노래한 시인은 사랑의 은유를 아는 사람이다. 얇고 뜬 구름같은 사랑 이야기를 피하고 ‘허벅지’라는 신선하고 담담한 소재를 들어 극히 에로틱한 연상을 하게 하는 스마트한 사람이다. 은근하여 지속적이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원하는 사람이여, 천박하고 값싼 성이 아니라 진정 멋스럽고 격조있는 성을 추구하는 그대여, 허벅지를 주목할지어다. 
 
하정아. 본명 이정아. 1961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전주에서 대학을 마치고 1986년에 도미하여 남편 성을 따라 하정아가 되고 제인 하(Jane Ha)라는 영어 이름도 얻었다. LA에서 한인 신문사, 잡지사 등에서 일하다 간호대 졸업 후 간호사로 산 지 10여 년이 되었다. 1989년 <미주 크리스천 문학> 신인상과 1994년 한국의 <문학 세계>의 추천 완료로 등단했다. 수필집 『행복은 손해 볼 수 없잖아요』(2002)『물빛 사랑이 좋다』(2005)『나는 낯선 곳이 그립다』(2011), 간호 에세이집 『코드 블루』(2011),  물 에세이집 『꿈꾸는 물 백하』(2018), 수필 선집 『사막을 지나며』(2012) 등을 냈다. 구름 카페 문학상(2012), 고원 문학상(2012), 미주 펜 문학상(2009), 해외 수필 문학상(2005)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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