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수단에서 짧은 가톨릭 사제의 인생을 살았던 고 이태석 신부님! 우리 곁에 가까이 찾아 온 성자처럼 예수님을 너무 빼닮았다. 신앙인 이태석 신부님의 가치관은 무엇일까? 그분의 인생관은 무엇일까? 그는 예수님의 인격을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받아들였던 같다. 
이태석 신부님은 수단 사람들에게 교회의 교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람을 사랑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에게 인간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인생관이 ‘서로에게 하나의 꽃이 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사랑인 듯싶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믿는 크리스챤들에게 인생관과 가치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면을 통해서 필자는 예수님의 살아있는 인격을 소개하도록 초대되어 행복하다. 나는 크리스챤의 인생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챤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참으로 만나는데 이 글이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감사할 일이다. 주님께서 나를 움직이시어 당신을 온전히 드러내시길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예수님의 제자사명
1.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였다.”(마르6,7) 주님께 파견 받은 사람만이 사명을 완성할 수 있는 데, 그 사명이란 바로 선교이고 복음화이다. 하느님은 인간마음을 창조하셨고, 인간이 따르는 길을 가르쳐주셨는데, 특히 선교사인 교회의 봉사자는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선교와 봉사란 무엇일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는 것이 선교이고 봉사이다.” 또한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것”은 선교와 봉사가 “서로 사랑하는 친교” 곧 모든 일을 “공동합의”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선교사, 봉사자라면 이것을 제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뭐 때문에, 어디까지, 무엇을 하도록 제자를 원하시고 파견하실까. 특히 제자를 파견하는 그분이 하느님이신데, 그래서인지 제자의 환상도 하느님이셔야 한 듯싶다. 그래서일까 유일한 하느님 한 분만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개입하라고 허락하신 듯싶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사, 봉사자는 하느님의 권위를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남용하면 미래에 펼쳐질 드라마 각본을 즉시 망치게 하는 재앙이 일어날 것은 너무 분명한 교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6,8) 예수님은 돈 없이 출발할 것을 권고한다. 인간의 경험이 가르치는 바, 어떤 수단을 써서 생기는 모든 이익들과 효과적인 생각들은 그것들이 확산되는 데에 지불할 것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다. 부자의 헌금보다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신 것도 같은 예수님의 가치관에서 온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은 분명하다. 마음의 봉헌, 가슴에서 우러나는 봉헌을 칭찬하신다. 사실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경험으로 봐서 돈 때문에 문제는 생겨도, 돈이 없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없다는 것이 그동안 교회역사의 경험이다.

3.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6,9)는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마라.”(마태6,31)는 말씀과 가깝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일에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고 온유한 마음을 지니고 참 평화를 바라도록 가르친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교회의 봉사자들에게 오직 한 가지 여정에 필요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파견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만이 제자들에게 온전한 힘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사자(使者) 및 전령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배는 순풍을 만나든 역풍을 만나든 모든 조건들에서 어떤 한계를 만나면서 항해를 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나라 사람들을 친구로 여기며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였다.”(마르6,7)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6,8)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6,9)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짧은 인생을 살아가셨다. 
예수님처럼 길지 않은 사제의 인생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아니 내일도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여전히 남아있다. 그분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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