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은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올해는 마침 일요일이 초파일이 되어 행사하기가 좋았다. 오래전 초창기엔 주중이라도 정해진 그날에 봉행식을 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일부 어른들의 뜻을 받아 들여서 정해진 그날에 행사를 몇번 치러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낮에는 대부분이 일을 하다 보니 저녁 행사가 되어서 노인들은 오기가 힘들고 일할 만한 젊은 층들은 시간에 쫒겨서 허둥지둥 야단이었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신도로서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기독교 성향의 남의 나라에 와서 공휴일도 아닌 날에 적은 숫자로써 정해진 날의 행사는 우리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론 앞당긴 일요일에 행사를 하기로 결정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처음엔 그것도 좀 어색하더니 시간이 오래 지나니 지금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졌는데 오랫만에 일요일이 초파일이 된 날이 바로 올해가 되었다. 한국에선 공휴일이라 거리거리 마다 연등이 달리고 시청 앞 광장엔 큰 시설물 점등식도 갖고 해서 전국민이 부처님 오신날 분위기를 느끼게 되어 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불교 신도 조차도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으면 그날을 모를 정도의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접하곤 매우 놀란 적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살며 어떤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 주어야 살아가는데 힘이 될 것인가’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속담처럼 시간이 약이었다. 

모든 생명은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을 강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유연한 존재들이다. 이젠 그러려니 하고 편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무릇 그 어떤 행사이건 모임엔 사람이 많이 와야 분위기가 살아난다. 뜻을 같이 하는 따뜻한 마음이 함께 하고 거기다 여럿이 모이게 되면 본래의 온도보다 더 큰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평소엔 젊잖은 사람도 큰 국가적 축구 경기장에 가서 관람을 하다가 우리 선수가 골을 넣으니 벌떡 일어나서 덩실 덩실 춤을 추면서 고함을 지르는 모습 등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이곳의 불교적 행사는 언제나 조촐하다. 하지만 준비는 오래하고 정성은 듬뿍 들인다. 합창단 등은 수 개월 전부터 매주 일요일 마다 각자의 소임에 충실하게 정진한다. 그날에 내 놓을 비빔밥 재료는 경북 봉화 태백산에서 생산되는 표고버섯과 산나물 등을 세 개의 큰 박스로 보내왔다. 법당에선 아름다운 선율의 찬탄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그 제목은 ‘둥글고 밝은 빛’이다. 그것은  붓다께서 깨치신 진리의 빛이다. 그 실체는 일단은 둥금이다. 언제 어느때 어떤 민족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의 법칙이라야 그 범주에 들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자비심이며 평화를 지향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인류애이다. 그 자비심의 빛은 지구를 감싸고도 남아도는 영원의 빛이다. 그것은 우주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기에 이 지구가 없어진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한 물건이다. 그것을 금강경에선 이렇게 표현했다. ‘선천지이 무기시하고, 후천지이 무기멸이라’ (先天地而 無其始, 後天地而 無其滅). 그 원만하고 밝은 마음의 본성은 그냥 그대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 크고 밝은 덕은 끊임없이 뭇 생명을 밝음으로 키워내고 평화로 이끈다. 

부처님께서 길 옆 무우수 나무 그늘에서 태어나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45 년간 길에서 길로 다니며 그 둥글고도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전하면서 구시나가라의 길 옆에서 열반에 드신 80 년의 일생이 바로 그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래서 어둠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는 중생들의 마음을 자비로운 광명의 빛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우리도 부처님같이 그처럼 깨닫고 그 길을 걸어야 되겠다고 다짐하며 찬탄하는 날이 바로 부처님 오신날을 기리는 참 뜻인 것이다. 

그래서 그 날에 둥근 연등을 달고 밝은 불을 켜서 너무 밝아서 더 어두워 지고 있는 사바세계을 정화해 보자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날에 모여서 노래만 부르고 찬탄만하고 지나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치 허기진 사람이 맛있는 음식 얘기만 재미있게 하고 있으면서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는 것과 비슷함이니 반 개의 도토리 묵이라도 먹을 궁리를 해야 한다. 그 만큼 실천이 중요하다. 자칫 종교가 관념화되어 생각에만 머무른다든지 가슴에 달고 다니는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한다면 두 가지 죄를 짓는다고 우리 승가(승가 세계)에선 말한다. 

출가함으로써 부모님에게 죄를 짓고 불교의 뜻을 바르게 실천하지 못해서 부처님께 또 죄를 짓는다고 꾸짓는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수행을 하라, 마음을 밝히라, 비우라 등등 좋은 말씀들은 너무나 많다. 어떻게 하면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가 밝힐 수가 있으며 또한 자기의 마음을 비울 수가 있을 것인가? 잡히지 않는 애매모호함이 그 속에 잠겨 있다. 우선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것부터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자신의 힘 따라서 그 무엇이든 좋은 일을 해야된다. 작은 선행이라도 꾸준하게 하다보면 마음이 안정되고 정신이 밝아진다. 가족 중 한 사람의 마음이 지혜롭고 밝아지면 그 영향이 전 가족에게 파급되며 그것이 사회를 밝히게 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옛 성인들이 그나마 그런 밝음으로 이세상에 오셨기에 오탁말세(五濁末世)에 우리들이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것이다. 네 마음 내 마음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각기 다른 것도 아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진 각각의 다른 가지일 뿐이다. 그래서 즐거우면 웃고 고통스러우면 찡그리는 것은 모든 인류들에게 골고루 적용된다. 또한 그 원 뿌리는 둥글고도 밝은 지혜와 자비의 광명으로 가득차 있고 그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원력의 기념식이 바로 부처님 오신날 행사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일요일엔 우리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아래와 같이 노래하며 부처님을 찬탄했다. “둥글고 또한 밝은 빛은 우주를 싸고 고르고 다시 넓은 덕은 만물을 길러 억만겁도록 변함없는 부처님 전에 한 마음 한 뜻으로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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