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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과 백경의 산티아고 가는 길] 배낭의 무게 마음의 무게출발점에서 함께 마음으로 심었던 ‘산티아고 나무’..이제 홀로 서야 할 시간이 된 것일까?
백경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 승인 2019.05.16 13:49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쪽 생 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성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있는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800km길 이다. 

유럽과 미국, 캐나다를 제외하면 비유럽인으로는 한국 순례자가 가장 많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수필로, 시로 글을 써 온 시드니 동포 박경과 백경이 다른 일행 2명과 함께 다녀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수 많은 책과 정보들이 있지만 시드니에 사는 두 여인의 눈을 통해 드러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기존의 수많은 산티아고 이야기들과는 '다른 색깔로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교대로 쓰는 '박경과 백경의 산티아고 순례길' 을  3월 8일부터 11월까지 격주로 연재한다. 백경은 여행길을 사진 대신 그림으로 기록했고 그 일부를 백경의 글과 함께 싣는다(편집자 주).

포도주 샘 발견, 수도꼭지를 틀어 붉은 와인을 가득 채운다. 이라체 수도원에서는 매일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포도주를 제공해 준다.

결국 일행은 로르카(Lorca)에서 갈라서기로 했다.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에서 에스테야(Estella)까지 걷기로 한 계획은 배낭의 무게에 더해진 마음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목적지의 중간지점인 로르카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행은 한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들어가 맥주잔을 앞에 놓고 모나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누가 먼저 말을 꺼내주기를 기다린다. 서로 배려하며 보폭을 맞추어 왔던 지난 일주일간의 시간, 출발점에서 함께 손을 잡고 마음으로 심었던 ‘산티아고 나무’는 이제 잡았던 손을 놓고 홀로 서야 할 시간이 된 것일까? 

다음날 이른 새벽 일행은 알베르게 문 앞에서 서로를 포옹해주며 “부엔 까미노”로 작별인사를 했다. 일행과 헤어진 나는 터벅터벅 들녘을 향해 걸었다. 어떻게 되겠지… 그렇게 혼자 걷고 싶어했는데 소원이 이루어져서 좋기도 하겠다며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도 한 편에서 불쑥 일어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답게 나누었던 대화도, 시원한 물병을 건네주던 손길도 사라진 길, 갑자기 찾아온 공허가 만만치가 않다. 앞으로 혼자 이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나. 도중에 아프면 어쩌지? 그동안 숙소 예약은 물론이고 지도를 보며 알베르게를 찾아주던 W의 고마움도 새삼 전해진다.  

한 순례자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더니 태우고 있다. 그녀에겐 마음의 짐이 더 무거웠던 것일까. 또 한편에서는 순례자가 순례자들에게 명상음악을 틀어주며 물과 과일을 제공하고 있다.

일행과 조금씩 거리를 두기 위해 오늘은 30km를 걸어 로스 아르코스(Los Arcos)까지 가기로 했다. 걷는 내내 숙소가 걱정되어 에스테야(Estella)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바(Bar)에 들어가 지배인에게 핸드폰을 넘겨주며 알베르게 예약을 부탁했다. 그가 스페인말로 몇 군데 통화하더니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린다. 잠자리가 해결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빨리 걷지않아도 되겠다.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팁으로 거금 2유로를 쥐여 주고 나왔다. 

에스테야 마을을 벗어나 3km 지점쯤에 이르니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11세기에 지은 이라체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ia la Real de Irache)이 보였다. 시드니에서부터 기대하고 있었던 포도주 샘(Fuente del Vino)이 있는 곳이다. 이 곳 수도원에서는 매일 순례자들을 위하여 무료로 포도주를 제공해 준다. 나는 가지고 있던 물병의 물을 버리고 수도꼭지를 틀어 붉은 와인을 가득 채운다. “순례자여! 산티아고까지 힘차게 가려면 이 포도주 샘에서 잔을 따라 행운을 위해 건배하세요!”라고 적힌 문구가 보인다. 우연치곤 참 기막힌 날에 신으로부터 받은 위로의 선물, 혼자가 된 나를 위해 축배의 잔을 들어 올린다. 브라보!

예상보다 일찍 목적지의 반 지점인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Villamayor de Monjardin) 마을에 도착했다. 점심도 해결할 겸 카페로 들어가 또르띠야(감자와 계란을 얇게 썰어 넣어 만든 달걀찜같이 생긴 빵)와 물병에 받아온 와인을 마시며 공허한 속을 채운다. 저 멀리 들녘에서 순례자들이 개미처럼 줄지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 어제 저녁 식사를 함께했던 부천에서 온 어거스틴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 이상씩 사연을 가지고 온 것 같다고 했다. 살아오며 사연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78세 어르신은 무슨 깊은 사연이 있기에 힘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워 이 험난한 길을 향해 오셨을까?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천 년 전의 순례자들이 걸었던 길의 끄트머리에 줄을 선다. 

로그로뇨(Logrono) 알베르게 뒷마당. J와 나란히 앉아 꽃가루를 감상하고 있는데 그녀의 어깨가 들썩인다. 눈꽃이 눈물로 떨어지고 있다.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해서 예약해 둔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은 숙박비가 일반 알베르게 보다 무려 3배나 비싼 호스텔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핸드폰에 저장된 몇 군데 알베르게로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화를 거는 곳마다 모두 예약이 끝난 상태라는 말만 반복됐다. 이제 리스트에서 남은 건 딱 한 곳뿐, 별 기대 없이 번호를 누른다. 걸어오며 장난삼아 하늘에 대고 V자를 그렸던 것이 행운이 되었을까? 수화기 속에서 침대가 몇 개밖에 남아있지 않으니 빨리 오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 곳에는 박경 선생님 부부는 물론이고 S와 J도 도착해 있었다. 헤어져 하루도 되지 않아 우리는 같은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일행과 헤어지기 위해 30km씩이나 보폭을 넓혔지만, 순례길의 출발선이 같았던 우리는 거리의 폭을 좁히지 못한 채 서로를 바라보며 어정쩡한 웃음을 주고 받았다. 일행과 갑자기 헤어지게 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박경 선생님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우리는 시원한 밤 공기와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는 산타마리아 대성당 앞에서 해물 스파게티와 피자 그리고 레드와인 잔을 부딪치며 아름다운 이별을 했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로그로뇨(Logrono)로 향하는 숲길, 한 순례자가 돌무더기를 쌓고 있다. 곧 이어 주머니에서 편지같은 것을 꺼내더니 불을 붙여 태우기 시작한다. 편지는 삽시간에 재로 변했다. 그녀에겐 배낭의 무게보다 마음의 짐이 더 무거웠던 것일까? 나는 얼마나 더 걸어야 움켜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한 남자가 나뭇가지에 배낭을 걸어놓고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명상음악을 틀어주며 물과 비스킷 그리고 과일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길을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바구니에서 사과와 비스킷을 집어 나무 그늘로 찾아간다. 순례자가 순례자에게 내미는 손,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과 그의 멈춤의 시간, 나와 그의 순례길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일행은 마음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로르카(Lorca)마을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접어드니 글씨가 적힌 나무판자 하나가 소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 “emotion is your treasure”, 며칠 복잡했던 마음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땀방울을 훑고 지나간다. 산을 벗어나자마자 고속도로가 나오고, 육교가 들녘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고 있다. 육교 위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신발을 벗고 쉬어가기로 한다. 저 멀리에서 차들이 규정 속도 120km를 넘나들며 내게로 달려오다가 빛의 속도로 사라져 간다. 차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멀미가 나기 시작한다. 개미처럼 한 걸음씩 걸어온 길, 나는 일상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것일까? 

로그로뇨(Logrono) 입성을 축하해주려는지 나무에서 꽃가루가 눈처럼 날린다. 휴식시간을 줄이며 전력투구로 달려와서인지 공립 알베르게에는 내게 내어줄 침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 샤워를 끝내고 빨래를 해 널은 후 뒷마당으로 나가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햇살을 쐰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S와 J의 목소리다. 두 여인은 나를 보자마자 도망가 봤자 손바닥 안이라는 시선을 던지며 들고 온 비닐봉지를 흔들어 보여준다. 그 안에는 씀바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시드니 집 뒷마당에서 잡초로 자라던 씀바귀가 샐러드로 변신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고 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바람을 쐬려고 뒤 뜰로 나가니 J가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불빛에 흩날리는 꽃가루를 감상하고 있는데 옆에서 그녀의 어깨가 들썩인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길이 너무 외로워. 외로워서 끝까지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밤 하늘에서 눈 꽃이 눈물로 떨어지고 있다. 

백경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info@hanho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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