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도전 – 역성혁명의 풍운아
2. 신숙주 – 변절자인가 충신인가?
3. 원균 – 이순신 성웅화의 제물
4. 광해군 – 선견지명의 명군 

역사적 인물들은 필요에 따라 평가가 확대 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판단은 그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이 평가는 고정적일 수도 없고 고정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인물은 당대의 가치기준, 이념조작으로 쉽게 왜곡돼 기록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상을 접근해 보기 위해 동태론적 접근을 해서.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 

1. 정도전
이성계를 찾아가다

1383년 정도전은 삼각산 밑에 삼봉제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가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북쪽으로 떠났다. 그는 야인을 물리쳐 명성이 높은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 군막은 기강이 엄숙하고 대오가 잘 정돈되었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은밀히 말했다.
“훌륭하도다. 군사여, 무슨 일인들 못 하리요”
이성계가 물었다. “무슨 말이요?” 
정도전은 짐짓 둘러댔다 “왜구를 친다는 말이외다” 

두 명이 다 선문답을 하면서 서로의 의중을 읽었다. 정도전은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맹자가 말한 역성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만남에서 정도전은 이성계의 정예 군대와 일사 분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한(漢)나라를 세운 고조의 군사 장량을 자처했다

1384년 가을 전교시부령(典校侍副令)으로 복직과 동시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양국간 첨예한 외교적 갈등을 해소했다. 이로부터 9년 동안 이조 건국을 위해 하는 일엔 그의 손길과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이색과 수구파는 옛 법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고 했다.

1389년엔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새 왕으로 만들었다. 그는 공양왕에게 많은 걸 건의 했다가 수구파에 의해 봉화현, 그 뒤 나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주선으로 다시 조정에 나왔다. 이성계가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다치자 김진양 등 수구파가 이틈에 개혁파 정도전, 조준, 남은을 죽이려 했다.

정몽주를 죽이다
이방원이 반대파 정몽주를 설득해 보려고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하여가(何如歌)로 정몽주의 마음을 떠봤다.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얼거진들 엇더리
우리도 이가치 얼거져 백년(百年)지 누리리라 

돌아온 정몽주의 답은 단심가(丹心歌)였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이방원은 할 수없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다. 정몽주가 죽자 정도전은 서둘러 이성계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 드디어 그의 꿈이 이루어 졌다. 그는 고려를 배반하고 스승과 동료의 반대편에 섰다.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취중에 그는 “한고조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썼도다”라고 중얼 거리곤 했다.

선죽교를 찾은 필자 2017년 5월

역성혁명
새 왕조가 들어선 후 7년 간 그는 눈부신 일을 해냈다. 먼저 국가 이념의 성립, 통치 제도의 정비였다. 국가 이념을 유교로 삼고 성리학을 정통교학으로 했다. 그는 ‘심(心) 불교’ 기(氣) 도교’ 이(理) 유교’ 편을 지어 유교가 실천덕목으로 인간생활에 충실한 점을 강조했다. 불교의 이론을 비판한 ‘불씨잡변(佛氏雜變)을 썼다.

그는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경제문감(經濟文鑑)도 썼다. 전환기에 사상적 혼돈을 극복하기 위한 정립이었다. 통치 체제는 중앙집권, 통치철학은 왕도, 민본주의였다.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이룩한 것이 천도(遷都)였다.

개경엔 언제나 저항세력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동의로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다. 이성계는 새로운 도읍지 자리를 돌아 보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양이 보이는 언덕에서 “나는 이제 모든 근심을 잊었노라” 하여 그 곳 이름이 망우리(忘憂里)가 되었다. 묘자리로는 더 이상 좋은 이름이 없다. 처음 자리 잡은 곳에서 무학대사가 “십리를 더 가라”해서 그 곳은 왕십리(往十里)가 되었다. 1394년 궁궐과 성곽 윤곽이 10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정도전과 무학이 경복궁 방향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무학은 인왕산, 정도전은 북한산이었다(火氣) 왕은 북을 등지고 앉아야 한다는 정도전 주장이 이겼다

그는 경복궁, 근정전, 광화문, 숭례문, 흥인문, 돈의문, 숙정문 등 서울의 모든 궁궐과 대문과 동네 이름들을 지었다. 4 대문은 유교 군자의 덕목 다섯가지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동대문을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을 소지문(炤智門)이라 하였다가 북쪽에서 오는 음기(陰氣)를 막는다는 의미의 숙정문(肅門)이라고 고쳤다. 정(靖)이란 글자에 지(智)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 남쪽 관악산에서 오는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숭례문 간판은 가로로 세웠다. 5상 중 마지막 자(字)인 신(信)은 서울 중앙에 있는 보신각(普信閣)에 붙였다.

왼쪽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수도의 행정 분할도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때로 명나라에 가서 외교도 하고 전국을 돌며 지방의 구회과 성보(城堡)의 수축을 결정했다

세자 책정
그의 노력으로 새 왕조는 반석 위에 서게 되었다. 이성계는 첫 왕비 한씨에게 6남을 두고 후비 강씨에게 2남이 있었다. 한씨 소생들은 새 왕조 건설에 공이 있었으나 아버지 이성계가 군 사령관으로 여기저기 옮겨 다닐 적에 성장하여 나라를 맡기기에는 학문이 얕거나 거칠고 우락부락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후 자란 방석은 지혜롭고 성격이 순했다. 태조도 방석을 사랑했다. 정도전은 강씨 2남 방석이 영리해 애지중지했다. 태조에게 “방석을 세자로 삼으십시오” 하고 권헸다. 태조는 방석을 세자로 삼고 정도전이 스승이 되었다. 

세자 책봉은 넷째 방간과 다섯째 방원의 불만을 불렀다. 이들 왕자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정도전은 사병을 해체하고 왕자들을 행정 감독 등의 직책으로 각 도로 분산시키려고 했다. 이런 계획들이 첩자에 의해 방원의 귀에 들어갔다.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은 더 이상 때를 기다릴 수 없었다. 그들에겐 방원의 아내가 감추어둔 무기가 있었다. 당시 정도전은 요동정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날밤 정도전이 있는 남은의 첩집으로 쳐들어 갔다. 이웃집에 불을 지르자 이들이 밖으로 황급히 나왔다. 방원의 종에 의해 정도전이 끌려 나왔다.

그가 “공이 예전에 살려 주었으니 한번 더 살려주시오”
그러나 방원은 정도전을 칼로 치라고 명령했다.

이어 정승 조준과 김시형이 끌려 나왔다. 조준이 “신은 모르는 일입니다” 떨면서 말했다. 방원은 조준을 앞 세우고 궁궐로 들어갔다. 이제가 군사를 동원 방원을 치자고 하자 이성계는 “자중(自中)의 일이니 할 수 없구나”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방석과 방번의 죽음
방원은 적자 중에 세자를 세워달라고 부친에게 고했다. 태조는 마지 못해 둘째 방과(후에 정종)를 세웠다. 왕은 세자였던 방석에게 “네가 편하게 되었구나” 했다

그러나 방석은 궁궐 밖으로 나가다 길에서 맞아 죽었다. 방번도 통진에 유배 령이 내려 가다가 맞아 죽었다. 방원은 두 아우의 죽음을 왕에게 비밀에 부쳤다.

태조는 방원이 두 아우를 죽인 것을 알고부터 방원을 몹시 미워하기 시작했다.

제 2차 왕자의 난
태조의 넷째 아들이고 방원의 바로 윗 형인 방간은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으나 방원에 비해 공적이 모자랐다. 이 때 방원을 도와 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박포가 충분한 보상을 못 받자 방간에게 와서 돕기로 한다. 박포 같은 큰 응원군을 얻은 방간은 힘을 얻어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투에서 방원에게 지고 두 명은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한다. 

함흥차사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 주고 함흥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원은 백성들에게불효란 인상을 지우기 위해 부친의 환궁을 원했다. 그러나 차사가 오면 이성계는 계속 죽여 의지를 보였다. 옛 친구 성석린이 찾아왔다. 수 많은 전쟁을 같이 보낸 전우이기도 하다. 이성계가 “나에게 한양으로 돌아가자는 말만 말라”고 언질을 주었다. 두 명은 옛날 이야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시간을 보내다가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성석린이 절을 하며 “한양으로 돌아갑시다”라고 간곡히 청한다. 

성석린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이성계가 “내가 안 들은 걸로 하겠다. 어서 떠나라”하고 돌려보내자 부하들이 “다른 차사들과 형평성에 어긋납니다” 하고 항의했다. 이성계가 계산해 보니까 성석린이 벌써 강을 건넜을 시간이다. 그래서 “강을 건넜으면 그냥 놔두고 아직 안 건넜으면 처형해라” 했다. 성석린은 함흥에 사는 누이 집에 들렸다가 늦게 오는 바람에 나룻가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마지막으로 무학대사가 갔다. 그는 젖 떨어진 송아지와 에미 소를 따로 묶어 두었다. 소 우는 소리가 시끄럽자 이성계가 이유를 물었다. 무학이 “하물며 동물도 저러거늘 아들과 인연을 끊는 다면 누구에게 이 대업을 맡기시겠습니까?” 했다. 늙은 이성계도 할 수없이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으로 돌아 온 이성계 
방원이 교외로 아버지 마중을 나갔다. 이때 하윤이 가운데 나무 기둥을 세우게 했다. 태조가 방원을 보자 분노에 못 이겨 활을 쏘았다. 방원은 나무 기둥 뒤로 숨었고 화살은 기둥에 꽂혔다. 이성계는 명궁이었다. 

부친 환영 향연에서 이성계가 옥새를 방원에게 주며 “네가 원하는 게 이 거로구나. 가져가라” 했다. 명실상부한 왕이 된 방원이 아버지에게 술잔을 올렸다. 그러나 술잔을 내시를 시켜서 건네게 했다. 이성계가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이로다” 하며 소매에서 쇠 방망이를 내려 놓으며 술잔을 마셨다. 그는 궁궐로 안 들어가고 소요산 밑에서 지내다 죽었다. 

정도전이 건국한 이조
정도전은 선견지명이 있는 개혁파였다. 조선 개국은 정도전 없이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장량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알고 야인 생활을 했는데 정도전은 끝까지 남아 요동정벌, 세자책봉에 관여하다가 죽었다.

방원이 그를 악인으로 깎아 역사에 나쁘게 기록되었다. 그의 유교숭상, 사대사상이 후대에 비판을 받았다. 고려말 불교의 타락한 사회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다. 후에 유교가 공담으로 흘러간 것은 이념의 타락이었다. 그는 정치, 경제적 모순을 바로 잡고 혼돈을 수습한 혁명가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억울하다.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정도전은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한양 시내의 궁궐, 사대문,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다 지었다. 제 1차 요동정벌(1388)과 제 2차 요동정벌(1392)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다.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는 성리학을 공부했다. 부친의 친구 목은 이색의 문하생으로 정몽주, 권근과 동문이다. 정도전은 서얼 출신이라고 동료들에게 안 보이는 냉대를 받았다고 한다. 

정도전의 사후
방원(芳遠)이 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장애물인 정도전을 제거하고 그에게 역적이란 온갖 누명을 다 씌웠다. 조선의 건국에 실질적 주인공이며 조선을 설계한 그에게 두 임금을 섬긴 변절자로 낙인 찍었다.

자기네 손으로 죽인 정몽주는 충신 표본으로 내세웠다. 선진유학(先秦儒學)에서‘충
(忠)’은 정직, 성실을 뜻한다. 후대에 와서 충은 한 임금, 한 왕조만 섬기는 뜻으로 변했다. 개혁이나 민족적 과업을 수행하는 ‘충’ 보다 좁은 의미의 왕에게 복종하는 ‘충’이 강조되었다. 그 ‘충’을 한 임금을 위해 절개를 지키고 목숨을 바치는 통치철학의 방편으로 써먹게 된다. 그래서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정몽주는 충신, 이조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을 역신으로 만들었다. 정도전은 역신으로 죽었기 때문에 시호도 안 내려졌다.

자기의 일생을 알리는 묘비나 행장의 글 조차 없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출생 연도도 모른다. 역사학자 이상백에 의해 그의 생애가 다듬어 졌고 한영우에 의해 그의 사상이 추적 되었을 뿐이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가 봉화 정씨의 시조로 아전이었다. 그래서 그를 “한미(寒微)한 출신’ 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정운교는 직제학 같은 높은 벼슬을 지냈다. 정도전은 아버지가 영주에 살아서 영주 출신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벼슬을 하여 수도 개경에 살았다.아버지 친구인 목은 이색에게 글을 배웠다. 목은의 제자 정몽주, 이숭인 등과 친구가 되었다. 그는 촌티를 벗고 더욱 그의 재질을 다듬을 수 있었다. 친원, 친명으로 갈린 조정은 타락의 극을 치 달았다. 벼슬길에 오른 그는 친원파가 원나라 사신을 맞으라고 했지만 반대한 이유로 나주 회진으로 유배를 보내졌다

2년 만에 유배지에서 풀린 그는 삼각산 밑에 자기 호 삼봉(三峯)을 딴 삼봉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들에게 유학 이론과 친명(親明)의 당위성을 가르쳤다. 6년을 보내는 동안 나라는 남의 왜구, 북의 야인 습격으로 더욱 어수선해 졌다. 그래서 그는 이성계를 찾아갔던 것이었다. 

태종의 셋째 아들
방원은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복 동생 두명과 동복 형까지 죽이게 된다. 방원은 태종이 된 후에 자기는 첫째 양령과 둘째 효령을 제치고 셋째 아들 충령을 세자로 삼아 세종대왕이란 명군을 배출하게 만든다. 혹자는 방원이 저지른 죄는 세종을 탄생시킨 것으로 탕감(?) 되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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