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브리즈번 시내의 중심에 위치한 보타닉 가든(Botanic Garden)에서 케이트의 결혼식이 있었다. 케이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6개월경에 호주로 입양된 호주인 양부모의 가슴으로 낳은 딸이다. 나는 케이트의 양부모인 폴과 캐시를 볼 때마다 진솔한 사람의 냄새가 나는 인간미와 따뜻함을 느낀다. 입양아 가족들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느새 30여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한인교민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간혹 한인회모임이 있을 때면 양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꼭 한복을 입혀서 데려왔었다. 그런 양부모들의 사랑이 담긴 마음과 입양된 한국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주말 한글학교에서 입양아 가족들을 위한 특별반을 만들었으며 한글과 우리 문화를 가르치는데 온 정성을 쏟았다.      

캐시와 폴은 매주 토요일이면 한글학교에 온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던 나의 좋은 친구이자 학생들이다. 그 가족은 지금도 나를 ‘황 선생님!’이라고 한국말로 부르며 내가 자기 가족들의 영원한 한국어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주위에 순수함과 욕심 없이 긴 세월동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참으로 행운아인 셈이다. 호주라는 낯선 땅의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그런 호주 친구들이 내 곁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는다.  

가든 클럽 앞에는 둥근 원모양으로 다듬어진 잔디가 마치 초록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하고, 주례자의 뒤에 세워진 아치형의 기둥에는 순백을 상징하는 하얀 꽃들로 장식해 놓았다. 신랑 친구 두 명이 기타와 바이올린으로 클래식 ‘캐논’을 연주하며 결혼식을 기다리는 하객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준다. 잘생긴 신랑은 긴장된 모습으로 서있더니 사뿐히 걸어오는 신부를 바라보며 금세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는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케이트가 환한 웃음을 띠며 엄마 아빠의 손을 양손에 잡고 같이 입장하는 모습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온다. 그건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행복감 때문인 듯싶다. 

주례자의 진행 순서에 따라서 예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그들의 첫 만남은 술집에서 친구들이 만든 작은 소동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에 하객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그리고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을 편지로 써서 읽어 주는데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담겨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눈빛만 보아도 느낄 수 있지만 글로서 전해주는 사랑의 감정은 더 진심이 담겨있는 것 같다. 결혼식에서 했던 그 맹세들이 케이트와 신랑에게 오래오래 남겨지기를 바랄 뿐이다. 늦겨울의 햇살이 인생의 새 발걸음을 떼는 케이트 부부의 머리 위로 눈부시게 쏟아지며 축복해주는 듯하다. 나는 케이트와 신랑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빌면서 두 사람을 차례로 꼭 안아주었다. 
 
요즘 한국에서는 결혼적령기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 작은 결혼식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만을 불러서 소박하고 간단하게 적은 비용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케이트의 결혼식을 보면서 ‘아,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피로연은 간단한 몇 가지의 안주와 드링크로 케이트 부부를 축하하며 마무리 되었다. 내 마음에 걸리는 일 하나는 캐시 엄마가 신랑신부에게 선물하고 싶어 했던 기러기 한 쌍을 구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에 한국에 가게 되면 인사동에 가서 예쁜 목조기러기 한 쌍을 사서 케이트 부부에게 선물해줄 일이 숙제로 남겨졌다. 
  
오래전, 한글학교에서 폴과 캐시를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들려준 말이 있다. “나는 내 딸을 너무 사랑해요.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서 어느 날 문득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다른 가족들과 닮지 않았을까.' 하고 갈등하기 시작했을 때 아빠로서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내 딸에게 분명히 말해 줍니다. ‘얘야, 아빠 엄마는 정말  널 많이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한국인의 핏줄을 가졌어. 그래서 한국말과 한국 문화를 잘 배워야 한다. 네가 자라서 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충격을 받지 않고 스스로를 잘 지키며 살기를 바란다.” 
  
나는 정말 열심히 그들을 품어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3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이며 나는 성인이 된 아이들의 결혼식에 초대받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케이트의 경력은 놀랍기만 하다. 퀸즐랜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총장 비서실에서 일하던 시기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퀸즐랜드대학교를 공식 방문하는 행사가 있었다. 케이트는 책임자로서 모든 일정을 준비하며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후 퀸즐랜드 아나스타시아 팔라쉐이(Annastacia Palaszczuk) 주총리 비서실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지금은 켄버라에서 스콧 모리슨(Scott Morrison) 총리 비서실에서 일한다. 케이트는 미들네임에 한국이름인 ‘수진’을 여전히 쓴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훌륭하게 키워준 양부모들, 잘 자라준 케이트, 다른 형제자매들이 고맙기만 하다. 케이트가 언젠가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기억하며 한 몫을 보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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