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진

속 맘 터지기 전 산이 먼저 멍울 터트리고 진달래꽃 지천,
초식만 해도 몸이 자라던 시절 엄마는 할머니 병수발 하다
산으로 들로 도리깨질 당한 보리알처럼 튕겨 나갔다
엄마 찾으러 넘던 산마루, 지척인 듯 아닌 듯
웬일일가 아련한 트럼펫 소리
나를 부른다
마치 내게 할말이 있는데 달리 방법이 없어
내가 지나갈 줄 알았다는 듯
얼굴 없는 한 낮의 연가라 믿고 싶은 두근거림,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 일거라고
그 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산속이었고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그 후 적어진 말 수에 딴 생각이 많아졌다
베르테르 데미안도 꿈 속에 들어오고, 교복 칼라는 더 희어지고
여름방학이 되어 유성 외가 포도밭 가는 길 언덕
그 트럼펫 기다렸다는 듯 다시 불어주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흔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소리
맘 한구석 보자기에 돌돌 말아 놓았다
소리가 키운 칸나
시샘달* 지날 무렵 몸 밖으로 나와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한 세월 지나 이제 붉은 칸나는 내게서 멀어져갔다
다시 피지 않는 내 정원의 붉은 색
남 십자성 아래 빛 바랜 칸나 철없이 피고 진다

*시샘월—2 월, 잎샘 추위와 꽃샘 추위가 있는 끝 달

공수진(시인)
시집 ‘배내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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