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명산 블루 마운틴**을 나는 청산이라고 부른다.

1.
웬트워스 폴스, 찰스다윈 코스를 따라가다 만난 폭포 앞에 섰다. 웅장한 물줄기가 높은 절벽을 타고 하강한다. 낙하하는 물줄기에 몸을 실어 물살을 느껴본다. 거침이 없지만 거칠지 않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부대끼며 바위를 깎아내린 것일까.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요란하지 않다.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물줄기를 이루고, 물줄기가 모여 계곡을 만들면서, 폭포는 숲의 젖줄이 되었다. 숲의 젖줄은 웬트워스에 이르러 운명처럼 만난 절벽 위에서 당당하게 떨어지고 있다. 그 위용은 날카로운 것을 둥글게 하는 힘이기에, 오랜 세월을 다듬듯이 살아낸, 내 어머니의 모습처럼 웅숭깊다.
절벽에 붙어서도 궁색하지 않게 자란 나무들을 올려다본다. 끝에서 곧게 뻗은 나무는 하늘과 맞닿을 기세다. 높은 곳에 있지만, 전혀 위협적이거나 고압적이지 않다. 폭포수가 내어준 바위틈으로 나무 하나가 절벽을 부둥켜안고 있다. 폭포를 지키고 있는 전사의 자세다. 뿌리가 바위를 뚫고 땅에 닿았는지 산바람에도 흔들림이 없다. 폭포수를 동반 삼아 버틴, 절벽처럼 가파른 세월을 지탱하고 이겨낸, 내 아버지의 모습처럼 의롭고 강인해 보인다.
하강하는 것과 높이 솟는 것이 절벽을 사이에 두고 조화롭다. 청산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다행히 나는 이 자연의 조화를 내 집 정원에 들어 앉히려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는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조급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산이 보고 싶고, 산에 목이 마르면 산에 오르면 그뿐이다. 산을 걷고, 바라보고, 듣고, 매만지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뿐인 것이다. 이제는 껴안고 싶어도 껴안을 수 없는 거리에 계신 당신들이 그곳에 있다.

2.
카툼바 세자매 봉에서 루라 케스케이드 쪽으로 길을 잡는다. 3백여 미터쯤 지나서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안내 표시가 어디에도 없다. 안내판이 붙어 있던 자리에는 지지대만이 홀로 남아 휑하다. 방향으로 보아 오른쪽 아랫길은 아니다. 왼쪽으로 난 두 길 중 하나인데 가늠이 되지 않는다. 휴대폰을 열어 지도를 검색한다. 인터넷 시그널이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폰과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 포기하고 감으로 방향을 잡아 움직인다. 내게 더 이상의 지도는 없다. 다음 시그널을 기대할 뿐이다. 2백여 미터쯤 더 가니 두 갈래 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또 안내판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 이상하다. 어디를 가도 이정표를 따라 다니면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청산 트레킹 코스다. 그런데 길잡이 안내판이 없으니 판단을 할 수가 없다. 먹을 것이라곤 겨우 물 한 병이다. 하루 내내 걸어야 하는 긴 코스로 진입하게 되면 낭패다.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가게 되면 차 있는 곳까지 다시 가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쯤에서 감을 믿고 방향을 정할 것인지, 되돌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변을 살펴보니 누군가 고의로 안내표시판을 망가뜨린 흔적이 보인다.
“누가 왜 그랬을까. 카운슬에 신고는 되었겠지. 실연당한 젊은이가 애인과 같이 왔던 길을 더듬다가 홧김에 부숴 버린 것인가. 안내판을 제작하는 사업체에서 일을 만들려고 한 것인지도 몰라. 설마 타지 사람들에게 불만을 품은 청산 주민의 짓은 아닐 테지...”
더듬듯이 길을 찾으며 나는 청산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각에 몰두한다. 길잡이가 없으니 길 뿐만 아니라, 생각도 방향을 잃고 있다. 왼쪽 길을 선택해 몇 발자국 떼던 나는 결국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되돌아선다. 길은 훤하게 뚫려있는데 내 눈이 너무 어둡다.

3.
메가롱 벨리, 숲이 내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숲 한가운데서 계곡물 소리가 첼로 음처럼 장중하게 들리고, 물 건너에서 새소리가 메조소프라노 솔로 파트로 들려온다. 머리 뒤로는 작은 새들이 재잘거림이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물기 머금은 초록 사이로 풀벌레 소리와 바람 부딪히는 소리가 한꺼번에 공명을 만들고 있다. 나뭇가지마다 이파리들이 음표처럼 팔랑거린다. 바람의 지휘에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어느 바닷가 민박집에서 들었던 숲의 소리이기도 하다. 자연이 낳은 것들은 같은 소리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나 보다. 
한 줄기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공터가 보인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곳에 빈 의자가 놓여있다. 반갑다. 숲을 찾을 때마다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지만, 정작 내 오감을 깨우는 것은 사람의 흔적일 때가 많았다. 혼자서 옷깃은 여밀 수 있으나, 혼자서 내 등을 껴안을 수는 없다. 새삼 숲의 빈 의자에서 내리는 외로움에 대한 정의다.
의자에 앉아 숲이 내는 소리를 제대로 듣는다. 밖에서는 들을 수 없던 소리가 하나하나 분리되어 들려온다. 그리고 실체를 모르던 내 내면의 소리도 튀어나온다. 이정표에 의존해서 목적지만 보고 걷는 사이, 내 안에 있던 소리가 분절음을 냈던 행로, 그건 불협화음이기도 했다. 겉에서 보이는 화음만이 정도라 여기며 오선지에 그려온 내 삶의 단조로운 곡들이 들려온다. 화성의 종류가 여러 갈래인 것을 모르고 연주하고 있는, 귀가 어두운 연주자의 곡처럼 어설프기 그지없다. 물이 흐르는 메가롱 벨리 숲에서 나는 지금 내 삶의 변주를 위해 지나온 삶을 편곡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청산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숲으로 들어가 보자. 햇빛 좋은 겨울날, 유칼립투스 향 짙은 청산 숲속으로 들어가 보자. 겉에서는 들리지 않던 당신만의 소리가 연주될 것이다.


*널리 알려진 작자 미상의 고려가요 제목을 그대로 썼다. 제목에 얽힌 에피소드는 블루 마운틴을 소재로 한 다른 작품에서 따로 다루었다.
**시드니 시티에서 서쪽으로 약 100km 쯤에 떨어져 위치한 산으로, 그레이트 디바이딩 산맥의 일부이다. 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칼립투스에서 나오는 유증기가 햇빛을 통과하면서 푸른색을 띠기 때문에 블루 마운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유금란 수필가
산문집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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