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재미있다. 구성이 치밀하다. 장르가 블랙코미디 아닌가.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좌파 앵글을 갖고 제작되었다는 고정관념이 틀렸다는 것을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10분도 채 안 되어 시인하게 된다. 영화는 극부층과 극빈층을 대조시키면서 전개된다. 2020년 현재 서울 경기 지역에서 반지하 또는 지하에 사는 세입자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김 기사(김기택) 가족은 집이 없는 하류층 가족들을 대표한다. 반면에 박 사장(박동익) 가족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자기 사업을 일으켜 성공한 사업가,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 계층을 대표한다. 

박 사장이 사는 아름다운 저택은 유명 건축가 남궁 현자가 직접 설계하고 시공한 집이다. 건물의 자재와 미관도 훌륭하지만, 내부 실내 장식이나 편의성 그리고 여유로운 공간적 배려 등등이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모던한 건축물이다. 그래서 박 사장의 저택은 한국의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코리언 드림이며 종착점을 상징한다. 건물은 건축 미학을 넘어 한국 사회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기까지 한다. 저택 지하에는 이미 파괴와 자멸을 가져올 수 있는 기생충 가족( 가정부 국문광 부부)이 몇 년째 기생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숙주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지금의 코비드 19 바이러스처럼. 

문제의 발단은 더욱 진화되고 그래서 더욱 강력하고 대담한 새로운 기생충 변종이 숙주의 몸에 파고들면서 시작된다. 숙주는 무력하게 그리고 순진하게 이 신종 기생충에게 자기 몸을 허락하지만 새로운 기생충은 동일한 숙주 몸 안에서 뜻밖에 기존의 기생충과 맞닥뜨려 대결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어서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사실! 이 저택은 3개의 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지상층과 지하실 그 밑의 비밀 통로로 연결되는 지하 벙커! 한반도 내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 때문에 건축 설계가 남궁 현자 씨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전쟁 대피용 지하 벙커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유명인사라는 사회적 위치 때문에 새 집주인으로 입주하는 박 사장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두 주인을 섬기게 된 전 가정부는 진술한다. 영화 속에서 하나의 중요한 무대가 되는 이 어두컴컴한 지하 벙커는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똬리를 튼 전쟁에 대한 악몽과 공포를 상징한다. 특히 전쟁이 나면 잃어버릴 것이 많은 가진 자들의 공포는 세인의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서울 호화 단독 주택 아래에는 이런 비슷한 전쟁 대피용 지하 벙커가 많이 지어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들게 한다.

그런데 지하에는 놀랍게도 또 다른 벙커 인생이 서식하고 있었다. 수년 동안 햇빛도 보지 못하는 수인 아닌 수인, 그는 전 가정부가 두 주인 몰래 숨겨놓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는 지하에 살면서 아내가 밤마다 날라주는 주인의 냉장고에서 훔친 음식으로 연명해 왔다. 박 사장은 물론 가정부가 조금 '많이 먹는 편'이라는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인정하고 묵인하고 더는 의심치 않는다. 숙주와 기생충의 생태학적 공존이 이루어진 셈이다. 물론 상대방의 존재를 서로 모르고 있다는 전제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숙주와 기생충의 공생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장면이다. 자연은 사회를 그리고 사회는 자연을 서로 미러링하고 있다고 할까? 

인도에는 4개의 뚜렷한 카스트라는 신분 제도가 있다.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으로 시작하여 크샤트리아, 수드라, 바이샤가 그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이름이 주어져 있지 않은 제5의 계급이 존재한다. 불가촉천민을 말한다. 이 불가촉천민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접촉하면 부정을 타고 사회 전체가 병들고 타락한다는 믿음이 있어 인도인들은 이 천민들을 격리하고 이들과의 접촉을 피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한마디로 사람의 모습만 하였지 인간 이하의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스트 제도는 긴 역사를 가진 인도라는 복잡다단한 다민족 다종교 사회를 유지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한데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카스트 제도는 자본주의의 사회에도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을 구별시켜주는 매개체는 돈이다. 카스트보다도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차등 구조가 자본주의 계급사회이다. 돈 앞에서는 법도 권력도 허리를 굽힌다. 많은 한국인이 자신의 실력 보다 부풀려서 스펙을 제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야 좀 더 나은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명함이 왜 그렇게 세련되고 화려하며 많은 직함이 인쇄되었는지 이해가 간다. 물론 영화에서는 위조된 졸업장, 가짜 명함과 천민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덧칠한 화장과 가짜 교양, 가짜 어투로 나타난다. 학벌과 직함과 교양은 내가 한국 사회에서 어느 계층에 속한 사람인지 그 계급을 보여주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신분증은 프린터로 교양은 유튜브에서 얼마든지 주워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맞추어 적절하게 장식할 수 있다. 어차피 인생은 연극 아닌가!

1997년 후반 한국은 IMF 상황을 맞는다. 그러한 경제적 격변은  많은 박 사장 가족을 김 기사 가족으로 만들었다. 중산층은 엷어지고 중하층이 넓어지고 두터워졌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 내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무해한 자본주의에서 급속하게 유해한 자본주의로 변형된다. 실업률이 늘고 취직이 되었지만, 평생 돈을 모아도 자기 집을 장만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적어도 서울 지역에서. 돈을 벌어서 박 사장의 저택을 사겠다는 김 기사 아들의 꿈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중산층이 사라진 자본주의 토양에서는 유해한 좌파나 급진 국가 사회주의가 발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다. 미국에서는 중산층 계급에서 중하위로 떨어진 급진화된 우파 세력을 등에 업은 부동산 재벌 트럼프가 정치 전면에 나타났고 한국에서는 대학 졸업장을 쥐고도 택배회사나 아니면 임시직에 머물러 조직적인 착취를 감내해야 하는 3, 40대 젊은 불만층을 등에 업은 좌파 정부가 들어선다. 이른바 촛불 세력의 출현이다. 

더는 신분 이동이 지난해져 버린 사회에서는 계급 간 불신과 증오밖에 남는 게 없다. 다윈의 정글 법칙만이 남는다. 음습한 반지하에 살고 있어서 늘 썩은 행주 냄새를 온몸에 달고 살아야 하는 김 기사 가족이 맑은 공기와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샤넬 향수나 에스프레소 커피 향기가 배어있는 박 사장 부부를 좇아갈 현실적인 방도는 거의 없다. '사기'와 '음모' 외에는. 천민 특유의 저속과 천박함과 속임수와 범죄 그리고 어두운 정서가 몸에 땀 냄새처럼 배어있는 반지하 주민들의 작은 혁명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혁명은 비극적인 유혈로 끝난다. 

사회적 패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도 가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김 기사는 서서히 깨닫는다. 부의 기초가 튼튼해야 도덕과 정직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현실을 김기택은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 보며 심장으로 느낀다. 그러한 깨달음은 곧 이미 일기 시작한 질투와 분노에 불을 지른다. 혁명의 에너지는 바로 이 부자에게서 받는 모멸감과 분도 그리고 건널 수 없는 간극에 대한 질투이다. 그 질투는 결국 김기택의 손에 부엌칼을 쥐여준다. 그리고 흉기는 박 사장의 가슴에 꽂혀 버린다. 카인과 아벨의 해묵은 이야기가 다시 한번 반복된 셈이다. 영화는 자신들의 원 처소인 반지하 주택으로 돌아온 김 기사 아들의 독백으로 끝난다. 그리고 분노에 가까운 질투로 가득 찬 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속에는 음식 모티프가(음식은 기생충이 숙주에게서 훔쳐먹는 자양분) 많다. 그중 압권이 짜파구리이다. 갑작스레 쏟아진 폭우로 캠프를 취소하고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는 박 사장 부인이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정부로 위장해서 일하고 있는 김 기사 아내에게 짜파구리를 주문한다. 아마 텐트 속에서 먹도록 기획했던 음식이었는지 모른다. 예상치 못한 기상 변화로 인해 실행하지 못한 짜파구리를 집에 도착하자마자 먹어야겠다는 매우 로맨틱한 발상이며, 아무튼 그것은 박 사장 가족이 즐기는 게임의 연장이다. 아들의 생일 파티를 위해 인디언 전쟁 게임을 기획했듯이…말할 것도 없이 인디언 게임은 미국 백인 개척자들의 인디언 학살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짜파구리가 뭔가? 기생충 계층의 식탁에나 상시로 올려지는 음식이다. 빈자에게는 생존을 위한 양식이지만 부자는 가끔 게임 삼아 재미로 먹는다. 빈자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부자에게는 재미이고 게임이다. 그게 짜파게티와 너구리 라면을 합성한 짜파구리이다. 물론 부자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조소가 양념으로 들어간 음식이다. 정말 먹어보면 맛있다. 청와대에서 있었던 아카데미상 수상 축하 파티 석에서까지 제공된 메뉴이다. 이미 슈퍼 부자가 된 봉준호 감독의 입맛에 딱 맞았을 것이다. 가난했던 무명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러나 영화를 제대로 감상했다면 짜파구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다.  그것은 가난한 자의 최후의 자존심이고 자산이며 로고스로 작동하는 '가난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받은 후 한동안 부자들이 집성촌을 이룬 강남의 한 고급 레스토랑의 인기 메뉴가 되는 명성을 누린 짜파구리! 그렇다면 영화 기생충은 또 하나의 부자들의 고급문화 놀이였던가? 아직도 반지하에 사는 천민들을 조롱하는.


최무길 
이민법무사, 통번역사, 수필가
수필집 '무너지는 것들 속에서'
역서'블루 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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