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 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 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생각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나니라. 
보왕삼매론 (寶王三昧論)이라는 짤막한 10 가지 교훈 중의 한 구절이다. 뭇 생명들은 안락이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 이면엔 그만한 노력이 요구되고 그것의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엔 긴 날개를 펴고 허공을 시원스럽게 날아 다니고 있는 많은 새들의 모습이 무척 평화스럽게 보여 진다. 그것은 먹잇감을 찾기 위한 힘든 날개짓이며 그들은 언제나 강자의 눈초리를 피하느라 불안감에 떨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인간 역시 삶의 내용이 그 새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힘듦은 우리들의 면역력으로 인해서 감내할 수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그 곤란함의 범위와 강도(強度)가 심하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반년에 가까워 오면서 서서히 그 힘든 상황에 적응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그 역시 살아남기에 민감한 생명력의 현실 적응의 지혜로움 이리라. 

현인(賢人)은 이른다. 어떤 개인이 어려움 없이 사업이나 학업 등을 성취하게 되면 남을 업신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그럴듯한 말씀이다. 그런 이들 중에 더러는 자신처럼 되지 못한 사람들을 내심으로 얕보는 수가 종종 있다. 자기 중심 생각으로 대상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만한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와서 거드름을 피운다. 그렇게 영민해서 사회적으로 출세해서 부와 권력이 생기게 되면 사치한 생각이 나게 마련이다. 자기 과시의 외형적 모습은 사치함에 그 초점이 맞춰지며 정서적 세계는 오욕락(五慾樂)의 탐닉이며 그 대표가 권력과 이성(異性) 등을 통한 자기 존재감의 극대화이다. 그들의 종말(終末)은 우리가 수차례 목도한 비극적 마감이다. 

그래서 현자는 근심과 곤란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라고 하신 것이다. 누구나 근심과 어려움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희망이 그러함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십 년을 통해서 그런 뜻을 이룬 이는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정신적 근심과 육체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공한 사람일수록 인간미가 있고 인격이 야무지게 다져진다고..
 그들은 곤란을 겪음으로써 상대방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변별력이 생겨나고 괴로움을 맛보면서 즐거움의 농도를 더 진하게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존, 치열한 경쟁속에서 어쩌면 근심과 곤란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생명성의 또 다른 모습이리라. 자연의 조화로움과 생명성의 평등과 고귀함으로 무장되지 않는 한 힘들고 곤란함은 언제나 자신의 그림자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다. 곤란함과 불편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코로나 바이러스의 크기가 얼마나 되느냐고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대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토록 작은 크기의 바이러스가 전세계인을 마스크를 쓰게 하면서 이토록 큰 곤란을 주게 하는 것은 그 무엇 때문일까? 생명에 대한 협박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생명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어떤 젊은 승려가 대도인에게 물었다. 

“선사님은 생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가 답했다. 
“물 속 달빛으로 숲 속 바늘을 찾으려 하고 
모래밭 흙 먼지로 만리성을 쌓으려 하네. 
가을 기러기 다람쥐와 다투지 않는데 
툇마루 애 늙은이 밤송이와 씨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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