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사찰인 정법사의 기후 스님을 만났다.  불교의 세계관에 대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내가 먼저 이것을 배워야 할 필요가 생겨서다.  9월 학기부터 ‘세계관과 상담’이라는 강좌를 새로 가르치고 있다. 교재를 읽다보니 주로 서양인의 관점에서 씌워진 것이었다. 기독교 세계관은 좋았지만 이슬람교는 빠져있고, 동양의 것은 미흡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불교는 소홀히 취급됐다. 그것도 불경에 근거한 내용이 아니라 헤르만 헷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묘사된 표현 등으로 대신했다.  

한호일보에 금요단상 필자 중 한 분인 기후 스님께 전화로 연락했다. 불교의 세계관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셨다. 그래서 몇가지의 질문과 함께 각각 40-50자 미만의 답을 부탁드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며칠 후 스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글로 써 보내는 것보다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게 좋겠다고 하셨다. 불경의 가르침은 쉽고 단순하지만, 짧은 글로 표현하기 어려워서 그렇다며 소탈하게 웃으셨다.

고스포드(필자의 집)로 오시겠다고해서 기차 역에서 만나 집으로 모셨다. 훤출한 키에, 정갈한 회색빛 승복을 입고 오셔서 보기 좋았다. 조계종 소속으로 90년대에 포교를 위해 시드니에 왔다고 하셨다. 연세가 나보다 세살 더 많지만 건강하고 활달한 분이셨다. 비슷한 세대에 같은 한국인으로 태어나 같은 도시에서 30년가량 살며, 같은 집안에서 함께 대화하며 먹고 마셨으니, 옷깃을 스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인연인 줄 안다. 그래선지 첫 만남이지만, 친밀감을 느꼈다. 

두시간 정도 나는 묻고, 그 분은 진지하게 답해 주셨다. 불교에 대해 낯선 내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가령 참된 최고의 실재란 마음도 존재도 없는 것, 어떤 행위나 자아도 없는 무위, 무아의 경지라고 하셨다. 세계의 본질은 빈 것에서 생긴 것으로 모든 것이 하나이다. 이것과 저것이 하나요, 현상과 정신, 부처와 중생이 모두 하나라고 하셨다. 인간이란 윤회의 체계에서 전생에 선과 악을 적절히 함께 한 업보로 태어난 존재이며, 역사란 강가의 한 지점을 통과하는 물 흐름같은 현상이라고 하셨다.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내용과 비합리적인 표현들이지만 그 의미들은 어림해서 추측할 수 있다. 직관적인 깨달음을 청하는 문구들이 신선한 면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가르키는 하나의 큰 그림, 즉 불교의 세계관은 솔직히 내게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것을 너무 쉽게 보기 원한다면 이 또한 불경에서 가르치는 10악 중의 하나인 탐심이 되는 것일까? 다행히 이 주제를 가르칠 10월까지 혼자 더 공부해야 될 방향을 잡았으니 감사하다. 그러나 불교에서 지식이란 “나누고 구분하는 헛된 망상으로, 도를 깨닫는데 방해 되는 것”이라고 했으니, 더 공부 하면 할수록 더 흐릿해지는 건 아닐런지 모르겠다. 

나는 하이든의 교향곡 45번을 좋아한다. 다른 웅장한 교향곡과 달리 조금은 차분하고  외로운 정감이 흐르는 곡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4악장의  끝무렵에 모든 악기들이 하나씩 연주를 멈춘다. 최후에는 바이올린 두사람만이 남는다. 첫 공연에서 각 연주자들은 자기 연주를 끝내면, 각자 보면대의 촛불을 끄고 악기를 들고 조용히  무대를 퇴장 했다고 한다. 그렇게 텅빈 무대로 연주를 끝냈다.  그 후부터 이 교향곡은  ‘작별’이라는 또 다른 부제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도 어느날 그렇게 조용히 이 세상과 작별하기 원한다.  장례예식도 가족중심으로 간소하게 이루어지기 바란다. 스님이 말씀 하신 ‘마음도 존재도 없이, 어떤 행위나 자아도 없는 무아의 경지’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불교적 표현이지만, 이는 본질적인 면에서 또한 기독교 영성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의 나는 감히 그런 순전한 경지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향으로 돌아가야하는 이 생의 마지막 작별의 순간이 오면 나의 모든 생각이나 행위, 바램이나 욕망을 포기하고 겸허히 주님만을 바라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때에는 보다 쉽게 아니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의 아집과 착각,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안다. 나를 온전히 부정하고 비우고 아니 내 자아를 잊어 버리는 그런 순간에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내가 스스로 알 게 될 줄로 믿는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렇게 연습하면 더 유익하지 않겠는가? 조금씩 흉내를 내보지만, 그것이 쉽지 않는 걸 고백한다. 나이 들수록 더 생각하고, 자주 몸을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라는 것도 오늘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 땅에서의 지혜인 줄 안다. 사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런 단상을 쓰고 강의를 하며 운동도 하고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고 있다. 그래서 난 아직도 내 마음과 존재, 행위나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너무 구차한 변명이 될까? 글쎄 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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