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고 분노가 치솟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결책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사랑입니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방해받아 일어난 분노, 나의 원의(願意)가 자유로운 길을 가고 있는데 길이 막히면 짜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계속 제지당하면 당연히 분노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길게 보면 인생의 길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수많은 인생길에서 우리는 헤어지고 만납니다. 이별이 내가 갈 수 있는 공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면,‘만남’은 새롭게 갈 수 있는 곳을 선물 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든 인생의 길에서 사랑은 분노와 화를 풀어낼 수 있는 비법입니다. 마음속에 화를 이기는 온전한 사랑을 담아보세요. 완벽하지 않고 고통스러우며,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길을 받아주고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화를 이겨나갈 수 있도록 사랑의 언어로 표현해 보세요. 우리의 마음속에는 원한과 울분 그리고 분노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분명 나의 감정을 무너트리고, 우리 자신과 주변의 가까운 이들에게 말로 상처를 주게 합니다. 
화나 분노를 자주 표출하는 사람은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 안에 숨어 있는 그 뿌리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마음의 거울을 바라보세요. 신뢰할 수 있는 친구에게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그렇게 하다보면 그 화의 뿌리가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분노를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배척을 당하는 이유는, 혼자서 앙갚음 할 것을 숙고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이겨낼 수 없다면 도움을 청하세요.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 변화에 더디고 그 가치에 적응하지 못하는 병자, 죄인, 세리, 부정한 자들을 예수님께서 찾아 갑니다.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그들을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늘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사랑을 원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언어를 그들의 마음에 사랑을 담아주십니다.
삶이 변해야 한다고 강변하거나, 죄책감을 지적하며 죄인 취급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면서, 잘 알아듣지 못하고 당신의 가르침과 다른 길을 가려 해도(마르 9,31-37) 나무라거나 잘못부터 따져 묻지 않습니다.

“너무 죄의식을 갖지 마세요. 온전한 나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응원과 용기를 이처럼 주시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일꾼의 1년치 품삯에 해당하는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다리위에 부었습니다. 느닷없이 벌어진 황당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가 더 불쾌해합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처럼, 여자를 나무랍니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마르 14,4-5) 
제자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양, 그 뜻을 다른 이에게 강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별거 아니라는 듯 조용히 말합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으니, 너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잘해 줄 수 있다”(마르 14,7).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 여자를 가만두어라.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마르 14,6)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을 중지시키고, 진심어린 그녀의 존재가 온전히 드러나는 행동으로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사랑을 담아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웃사람이 취하는 행동과 모습에 틀렸다 맞다 비판하며 살아갑니다.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불신합니다. 심지어 죄의식을 조장하거나 그 죄책감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온전한 자신이 충분히 드러나는 사회가 선진국입니다. 사람은 습관화된 삶의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양식이 사랑의 언어‘따뜻한 부드러움’ 곧 온유함을 지니면 됩니다. 사랑의 언어를 마음에 담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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