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큰 것과 높은 것을 유달리 좋아한다. 민족성이며 문화다. 어렸을 때 집안 아저씨 하나는 나를 볼 때마다 커서 ‘대장이 될래’, ‘똥 풀래’하고 놀리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대장, 높은 자리,  우두머리가 되라고 가르친 셈이다.   
 
당연히 잘난 한국인은 크고 높은 사람이 되어 큰 일을 해야 하고, 궂은 일은 작고 지위가 낮은 사람이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작은 것을 뜻하는 소(少)자보다 큰 대(大)자를, 아래를 뜻하는 하(下)자보다 높은 상(上)자가 언제나 좋다. 대통령, 대법원, 대학, 대장정, 대기업, 상관, 상급자, 상품(上品) 등 모두 그렇다.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이 자본과 시설과 인원이 많아 크고 높고 세게  보여 직장으로서 이미지가 월등히 좋은 것이다.
 
그러나 기계를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를 곧 알게 된다. 작은 부품 단 하나라도 부실하면 기계는 불협화음을 내고 전체가 멈춰버린다. 그러니 큰 것과 작은 것 사이에 차별을 할 수 없다. 정밀기계 기술이 앞선 스위스는 작으니 비싼 고급 시계로 세계 시장을 석권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이때는 작은 걸 소홀히 하더라도 전체는 돌아가니 그 차이를 쉽게 보지 못한다. 후유증은 크지만 식별하기 어렵다. 오늘 한국 사회의 불안정 요소가 대부분 거기에 있지만 그걸 걱정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중앙집권제에 오래 익숙해진 한국인들의 1차 관심은 정치와 권력이다. 그리하여 잘난 사람은 모두 서울로 가야하고 대장과 우두머리가 되려고 이전투구하고, 대중의  관심은 누가 대통령, 청와대 수석, 장관, 서울시장이 될 것인가에 집중되니 사회는 조용할 날이 없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누가되든 별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분석을 하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사회 현상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방법론은 크게  거시(Macro)와 미시(Micro)다. 전자는 현상을 큰 그림을 그려 보는 방식이고 후자는 현미경으로 봐야할 만큼 잘게 쪼개서 보는 방식이다.
 
이 구분을 우리의 생활과 가까운 정치와 경제를 사례로 들어보자.  정치를 논하면서 3권 분립, 정부 조직, 대통령의 권한, 공직 선거, 사법부의 독립과 제도를 이론으로 배우고 이걸 시행하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고 법치주의를 논하는 것은 거시적 분석이다.
 
그러나 제도와 법과 법치주의는 그걸 집행하거나 따르는 공직자와 일반 사람들이 정직하게 행할 때 비로소 그 효과가 발생하지, 아니면 장식에 불과하다. 공직 인사가 정실에 따라 이뤄지고, 선거 부정이 많고, 하찮은 단체의 회장이라도 하겠다면 먼저 밥을 사야 하는 풍토라면 그런 경우다.
  
한국은 법관과 변호사들의 천국인 게 틀림 없다. 매일 같이 터지는  크고 작은 고발 사건을 볼 때 그렇다. 법 위반이 팽배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제도와 법이 미비해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행태 연구가 필요한데 그건 미시적 분석이다.  
 
국민소득 미화 3만불 시대

경제를 거시적으로 분석하려면 보통 GNP, 인구, 국토, 자원, 통화량, 물가, 철강, 육류 등 제품의 생산량과 수출량 같은 개념과 지표를 가지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 나라의 경제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국민의 근면성과 도덕성, 반대로 과욕을 분석에 넣는다면 그것도 미시다. 잘 살게 되어도 빈부격차가 벌어지면 사회는 평화롭지 못하고 성장은 저해된다.

한국은 몇 개 재벌에게 재원을 모아주어 경제를 발전시킨 나라다.  이걸 꼭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과정에 정경유착과 부의 편중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에 비하면 대만은 중소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일으킨 나라다. 이 두 수출주도형 발전모델과 삶의 질을 비교한다면 미시적 분석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이 앞으로 균형적이며 건전한 발전을 원한다면 거시적인 것과 함께 미시적 연구가 활발해야 한다. 거대담론으로만은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아니다. 미시적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 많지도 않지만 있어도 갈 곳이 없다. 박사로서 교수 자리를 얻었다면 아주 운 좋은 케이스다. 그 흔한 경제, 통일, 군사 관련 국책 연구소는 넘쳐나지만 도덕성같은 행태와 사회 전반을 미시적으로 연구하는 기구는 정부와 민간 할 것 없이 거의 전무하다.  
 
한국인들 사이에 널리 쓰여온 격언이 우리의 생활 태도와 사회상을 잘 나타낸다. 그 하나가 “말로 배워 되로 풀어 먹는다.” 또는 “되로 배워 말로 풀어 먹는다”이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되로 배워 말로 풀어 먹는 건 잔머리를 굴려 쉽게 높고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 아닌가. 내실보다 겉모양을 더 중요시 한다는 말이 아닌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입만 움직이고(Move mouth)’ 먹고 사는 자리라는 냉소적인 말을 듣고 배웠다.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혀만 굴려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있었다.
 
이 모순을 고치는 방법은 임금체계를 고치는 것이다. 선진 서구사회의 사례가 이점 우리보다 앞서있다. 서양 어느 누구였던가 기억은 안 난다. ‘먹물’의 상징인 교수직에 목을 메느라 일어나는 여러가지 비리를 개탄하면서 대안은 교수 봉급을 낮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에 대하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매우 패러독시컬한 말이지만 일리는 있어 보인다. 호주만 해도 열심히 일하는 배관공들의 벌이가 교수의 보수보다 더 많다. .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건 먼 한국의 이야기라고 가볍게 넘기지 말기를 바란다. 해외 한인들은 나와서도 한민족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는가.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 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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