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 질 무렵, 동네 운동장을 두 바퀴째 돌고 있었습니다. 운동장 한편에선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걷고 있는데 축구공이 갑자기 나에게 날아왔습니다. 정면으로 낮게 날아오는 그 공을 나도 모르게 힘차게 받아쳤습니다. 순간 나는 악!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습니다. 축구공을 찰 땐 발 정면이 아닌 옆면으로 차내야 한다는 기본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른발 정면 그것도 제일 긴 엄지발가락으로 힘차게 공을 찬 것입니다. 엄지발톱이 까만 색깔로 변해갔습니다. 

내 딸의 딸, 그리고 아들의 아들과 함께 특별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손녀 수현이가 앙증맞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배받으세요!’ 
딸은 손으로 수현이 머리를 꾹 눌러 세배 자세를 만듭니다. 제법 그럴듯한 세배입니다. 손자 동하는 ‘세배드려요!’ 하는 며느리의 소리와 함께 몸을 뒤집습니다. 그런 뒤집는 세배가 신기하여 온 식구가 한바탕 큰소리로 웃습니다. 크게 웃는 소리에 놀란 동하가 울음을 터트립니다. 나는 울고 있는 동하를 꼭 껴안아 진정 시켜 줍니다. 내 품에 안겨 울음을 그칩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순간순간이 기쁨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성이 다른 두 사람, 사위와 며느리가 들어와 집안에 생기가 넘치더니 이어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삶 한 부분이 나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엌에선 아내와 딸 며느리가 한창 수다 중입니다. 거실에선 시드니에서 태어난 작은 아들이 서울에서 태어난 큰아들, 사위와 함께 축구 게임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 손주를 양팔에 안고 눈을 맞추며 여자들과 남자들로 구분되어있는 양쪽 방을 오갑니다. 아무리 어슬렁거려도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양쪽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내겐 이 아이들이 있으니 맘만 먹으면 어느 쪽이나 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에나 낄 수 있고 또한, 양쪽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처지가 나쁘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얼마 못 사실 것 같다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2주간 고국을 다녀왔습니다. 어머니는 90을 바라보고 계셨는데 ‘나는 저 멀리 호주에서 사는 우리 윤희와 철순 이의 혼인을 못 보면 결코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소원하시던 대로 손녀의 결혼식에 참석하셨고, 1년 후 손자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셔서 폐백 받으실 때는 말씀도 힘차게 하셨습니다. 결혼식을 마친 후 시드니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께서 갑자기 다시 쇠약해지셨습니다. 3개월 만에 다시 만난 어머니는 너무 기력이 없으셨습니다. 짧은 2주간 큰아들인 내가 어머니께 해 드릴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수발은 모두 누이들이 했습니다. 유일하게 내가 한 일이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 드린 일이었습니다. 손톱은 거절하시더니 발톱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시며 허락하셨습니다. 보료 위에 누워계신 어머니의 깡마른 발을 두 손으로 만지며 손톱 깎기로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발톱은 바짝 마른 장작같이 깎을 때마다 탁! 탁! 소리를 내며 튀어 나갔습니다. 어머니의 발톱은 이미 생명이 다한 마른 장작이었습니다. 그 후 나는 다시 시드니로 돌아와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발톱을 깎아 드린 것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 일이 되었습니다.

지금 내 엄지발톱은 까맣게 죽어있습니다. 까만 발톱을 깎아 내는 것은 내 몸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 같습니다. 새 발톱이 자라면서 밀려 나온 헌 발톱을 깎다 보면 생명의 연속성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은 죽은 발톱을 깎으며 부러 빨리 깎으려 하지 않습니다. 거추장스러운 부분만 다듬을 뿐, 인위적으로 떼어내진 않습니다. 까맣게 죽은 엄지발톱은 새 발톱이 맑은 색을 내며 자라 나올 때까지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면 나도 모르게 힘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나는 지금도 나를 보호하고 있는 아버지를 느낍니다. 솟아 나오는 새 발톱을 죽은 발톱이 보호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죽은 엄지발톱을 다시 내려다봅니다.
검은색의 죽은 발톱에서 아버지가 보이고, 어머니가 보입니다. 뽀얀 색의 새 발톱에선 수현이가 보이고 동하가 보입니다.


장석재 수필가
제14회 재외 동포 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
수필집 <둥근달 속의 캥거루> 
그림책 < 고목나무가 살아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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