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한국에서 온 도톰한 책 한 권을 받았다. 80년대 초반 길을 가다가 마주쳐서 몇 마디의 말을 건넨 것이 인연이 된 그 분의 책이다.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있었던 그는 내 처소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해주었다. 나는 정신없이 들으면서 크게 관심을 보였더니 그 자세가 40여년 가까이 이어져 오면서 책을 보낸 것이었다. 나는 그저 여러 사례들과 함께 논리정연하게 얘기하는 것에 재미가 있어서 그저 들었을 뿐인데 심리학자의 입장에선 그런 공감과 지지가 무척 돋보였다고 나중에 편지로 전해 주었다.  ‘ 침묵이 금이다 ’ 라는 말이 그를 두고 했을까? 

‘ 불편한 관계 걷어 차기 ’ 는 바로 그가 보낸 책 제목이다. 한국에서 심리학 공부를 하다가 미국에 가서 그 분야의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서양인 중심의 기존 심리학은 한국인에겐 어느 부분은 적용하기가 부적합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걸맞는 새로운 틀의 이론을 제시하며 ‘ 역동 심리학회’ 를 만들어서 꾸준하게 연구해 오고 있다. 

이번에 보내온 책은 그의 4번째 저술로써 수많은 상담 사례 중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서 만든 것이었다. 그 내용을 단숨에 다 읽고 책장을 덮고는 허공에서 솜털처럼 떠도는 백운을 바라 보면서 가녀린 한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 갈등을 안고 고달프게 사는 사람들이 저렇게도 많을까? 불편한 관계를 가져다주는 그 원인은 무엇이며 또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공을 차버리듯이 걷어 차서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특출한 묘방(妙方)은 없는 것일까? 특히 이민자의 특수한 삶의 현장에선 그 불편한 관계가 생길 수 있는 요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것을 수업료를 지불한다고 점잖게 표현한다. 적게 낸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고 어떤 이는 전 재산을 탕진하고 패가망신한 이도 더러 있다. 

주 원인은 언어 불통으로 인해서 법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곳에 살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법률 전문가에게 의지하거나 먼저 와서 산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조언을 듣는 과정에서 잘못되면 큰 수업료를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난 상대를 내 맘처럼 믿다가 상당한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큰 고통을 당했다. 
‘ 믿음은 수행을 하게 되는 근본이고 모든 공덕을 짓게 되는 모태이다. 또한 일체의 선행을 기르게 되어 의심의 그물을 끊어 버리게 하는 좋은 마음 자세이다. ’ 

화엄경에 나오는 거룩한 말씀이다. 그러한 선행의 순수한 믿음 자세를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드는 도구로 역이용하려는 이들이 교민 사회에선 오늘도 미소띈 얼굴로 힘들게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급할수록 돌아가라 ’ 는 말과 ‘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 매어 못쓴다 ’ 는 격언은 다들 알고 있지만 막상 자신의 일로 닥치는 난감한 상황이 되면 허둥대며 서두르기 마련이다. 많은 수업료를 챙기려는 이들은 그런 심리를 십분 활용한다. 안될 일을 된다고 한다거나 어려운 것을 쉽다고 말해 줘서 일단은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 그러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불편한 관계가 형성된다. 그것을 최소화하려면 무슨 일이건 신중하게 접근하는 꼼꼼한 자세가 요구된다. 특히 친척이나 친구 등과 함께 무슨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피차가 불행하게 되는 경우를 가끔씩 보게 된다. 어떻게 하면 그 불편한 ‘업 덩이’를 내 품에서 걷어 차서 없애 버릴 수가 있을까? 

그 책에선 여러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내용은 비슷한데 같은 처방으로 해소가 안 되는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살아온 여러가지 조건과 경험들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니 ‘ 병 하나에 약은 천가지이다 ’ 라는 말이 이를 입증해 준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것이건 불편함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상당한 분량의 그 불편함을 간직한 채로 살고 있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 상황인가? 아니면 생존에서 주어진 필연적 과정으로 감수해야만 되는 각자의 몫인가? 

내가 당한 과정적 해법을 생각해 본다. 우선은 문제의 발단에 대한 역추적으로 거슬러 되돌아 가서 깊은 생각을 해 본다. 그곳에서 자신의 부실했던 부분과 만날 수 있는 일말의 경솔했던 허물이 보인다. 그 때엔 결과적 책임을 반반으로 수용하게 되어 원망심은 반으로 줄어든다. 

그 다음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모두들 이 먼 타향에 와서 살아 보려고 몸부림 치는 인간의 군상들, 자세하게 바라보면 너나 없이 측은하게 생각되는 가없는 생명들이다. 자비와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 될 대상들이다. 여러가지로 얽힌 껄끄러운 관계가 회복되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 반의 무게라도 걷어차 버릴 수 있다면 멀지 않은 미래엔 그 불편함이 온전하게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