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유대인에 대해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때문에, 오만하고 목이 곧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지내다 보면 그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굳이 트집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 중에는 따스한 인품을 갖고, 도덕적이며, 가정적이며,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고, 한편 세상에 부딪치는 성정이 못된 사람들도 주위에 허다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수긍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같은 종교 공동체 안에서도 종교적 자부심이 남다른 사람들이라고해서 모범적이고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산다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에는 어느 종교이든 자부심과 자기 독선의 문제는 오랜 세월, 풀려지지 않는 인간의 죄성이 숙제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로마서3:10) 는 말을 수 없이 반복 하고 있습니다.

 1.엘리야의 절망과 자기 연민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로 손색이 없지만, 탈무드는 의외로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인물을 적잖이 폄하하는 글들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위대한 업적과 상관없이, 잘못한 측면을 가감없이 비판하는 그들의 가치 기준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에는 엘리야를 위한 포도주 잔을 따로 준비 하고, 할례의식 때는 의자 하나를 비워 두는데,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앉을 자리로 마련해 두는 것이 라고 합니다. 그의 위상에 걸맞는 의전 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450명이나되는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왕비 이세벨의 (열왕기상19:2) 추격을 받자, 두려워 광야로 도망쳐 자신을 죽게해 달라고 외쳤던 상황을 마치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극심한 두려움의 표현이었음을 지적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망감과 두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고 죽여 달라고 자기 연민과 독선에 함몰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부심으로 가득한 위대한 사명자로서 놀라운 기적과 승리를 쟁취한 바로 후의 뒷 모습인 것입니다. 탈무드는 엘리야가 유대인의 종말을 섣불리 예견한 ‘염세주의자’중 하나라고 평가 합니다. 그는 소망보다는 절망을 기대했고 자기 연민은 죽음을 선택하려는 독선으로 드러 났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위해 유월절과 할례를 행할 때 위대한 선지자를 위로하기위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태어나고 존재하는 현장에 그의 자리를 비워 두고 잔을 예비 한다는 것입니다. 

2. 유대인의 자부심과 사명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교리를 따지기 이전에 오랜 역사 가운데 이미, 세상은 이스라엘에게 의롭고 거룩한 오직 한 하나님이라는 사상을 제공한 것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을 사용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이스 야곱, ‘유대인의 논리’, P274) 라고 강조합니다. 

유대인들은 줄 곳 그들이 하나님이 제시한 도덕법을 세상에 알리려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기위해 선택되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강조 합니다.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자신들이 하나님을 모든 인류에게 알리는 역할을 제대로 해오지 않았더라면, 신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존재는 인류 문명이 존재하지 않고 또한 마치 신이 없는 것같은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더 낫다는 것을 말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더 나아야 한다(모리스 죠셉(1840-1930), ‘신조와 인생으로서의 유대교’, p117)” 라고 강조합니다.  

“ 우리는 세상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지분(분깃)이다 ”라고 (아브라함 죠슈아 헤첼, ‘지구는 하나님의 소유’, P109.)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지침을 주었다. 그리고 세상 저편의 사람들이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를 보게하는 것이다”라고 (해롤드 쿠슈너, ‘ 세상에게 ’, p 31) 그들의 선민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강조했습니다. 

더 나아가, 랍비 시몬 바 요나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너는 나의 증인이라”라고 선언한 말에 대해서, 그 말의 진정한 뜻은 “네가 나의 증인으로 살 때 비로소 너의 하나님이지, 무례한 행동을 하는 때는 너의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거의 2000여년 동안 랍비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증인으로서의 삶은 동일한 가치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왔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이 소중하지만, 증인으로서의 모범이 없다면 독선이 될 수 있다는 경고성의 지침을 놓치지 않는 듯 보입니다. 

3. 독선에 대해서

죠지 버나드 쇼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당시의 가장 저명한 지성인으로 간주되었는데,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아리안 족의 인종적 우수성의 독트린은 어떤 면에서 유대인들의 선민 사상을 베끼고 있습니다”라고 설파했습니다. 같은 관점에서, 1971년에, 감리교의 진보적 저널인 ‘인생 속의 종교’에서 “ 히틀러가 한 일이 선택된 민족이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아리안족이라는 것을 대 놓고 복수 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하나도 놀랍지 않다(여름 1971, P 279)”라고 기술했습니다. 그들의 자부심은 자칫, 자신의 우수성을 강조하다보니 그것이 상대를 비하하고 열등하게 만드는 독선으로 비쳐질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픈 역사 속에는, “하나님이 많은 민족가운데 우리를 선택했지만, 아! 하나님 뭐예요? 우리를 대적하기 위해서 그러신 거예요?”라는 이디쉬 조크의 역설적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선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반유대주의로 늘 위협받고 불안의 반복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랍비 울프의 “당신 생각만큼 당신이 훌륭하지도 않고, 세상이 형편없지도 않다”는 말은 자부심이 지나쳐, 오만의 길에 빠지기 쉬운 내면적 독선에 대해 뼈아픈 지적이 됩니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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