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막힘이 지속되고 있다. 처음엔 마스크로 코와 입을 막더니 이젠 가고 오는 길까지 막고 있으니, 더욱 더 갑갑함을 느낀다. 그나마 트인 것은 전화나 유튜브뿐이다. 이를 통해 안부를 묻고 다소의 소통을 하면서 모두가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감정의 교류는 걱정과 한숨으로 가득하다. 오늘은 어느 지역에서 몇 명이 나왔으며, 다음엔 또 어떤 조치가 내려질까에 대한 걱정과 궁금증이 화제의 전부이다. 

평소엔 손자, 손녀 자랑만 길게 하던 할머니들도 요즘은 코로나 소식엔 모두 척척박사다. 어느 지역의 어떤 이는 무슨 규칙을 어겨서 벌금을 1,000달러나 냈다는 등등의 얘기로 거의 하루를 때운다. 그만큼 생명 보전에 대한 불안감과 물질에 관한 소중함이 그 무엇보다도 크다는 방증이다. 이런 때에 생명과 코로나, 그리고 불안해하는 심리에 대해서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코로나가 이 땅에 와서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부합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생명은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며 그들은 각각의 그 개체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 왔던가? 자기 우월적 교만함에 취해서 뭇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는 않았는가? 

또 물질에 대한 애착은 어떠한가? 물질의 획득과 문명의 발달은 인류가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있는 기본 수단이 되어야지, 더 많이 갖고, 더 크게 발전시키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탐욕과 경쟁을 부추기게 되어있다. 그로 인해 체제의 우월성을 희론(戱論)하며 자기 세계의 확장을 시도하니 그것의 종점은 전쟁으로 비화되어 뭇 생명을 살상하고 문명과 문화의 유적을 파괴하게 된다. 

이러한 밝은 듯 어둑한 시점에 코로나가 출현하여 세상을 설치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다가 지금에 태어났으며, 무슨 고약한 생각으로 이 땅에 온 것일까? 대답을 들을 순 없지만, 어림짐작은 할 수가 있다.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며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을 보면 무슨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또한 생명 경시 풍조와 물질 만능에 찌들어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경종을 울리려고 나타난 것은 아닐는지? 이런 때에 너무 겁만 먹고 불안에 갇혀 있으면 그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평소엔 그렇게 잘났다고 설쳐대던 전 인류가 보이지도 않는 작은 저들의 출현에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돌아다니는 꼴을 보고 얼마나 많은 미소를 짓겠는가? 이러한 그들의 음흉한 계략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도리어 우리도 어깃장을 한 번 놓아서 그들이 얼른 떠나가도록 시도해 보는 것이다. 손님 접대를 잘해주면 그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만 홀대해 버리면 일찍 떠나게 되는 원리를 차용해 보는 것이다. 일단은 본체만체 관심을 두지 말고 눈길조차 주지 말자. 한편으론 그들이 은근하게 요구하는 합리적 진리의 세계인 평화와 안정된 상태를 엿보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들은 그들의 위력으로 인해서 불안해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완화해 보려고 핸드폰이나 TV를 통해 각자 관심 있는 내용을 보고 듣는 것으로 일시적 위로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오고 있다. 그것이 조금의 도움은 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상대성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런 매체를 통해 형성되는 교감의 여파는 일시적이어서 당시는 도움이 되는 듯하나, 돌아서면 허전하여 반복을 요구하는 세력으로 남는다. 곰곰이 따져보면 마약성의 일종이다. 

막힘과 불안감이 더해진 이런 때에 그런 정보들을 제공하는 전화 등의 기기를 최대한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과 마주 앉아 보는 것은 어떨까?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유심히 바라보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숨죽이고 생각을 가라앉혀서 자신과의 만남을 시도해본다. 내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며 지금까지의 내 생각과 삶의 태도는 올바른 것이었는가? 때론 허세를 떨면서 자기도취 되지는 않았으며, 그때 그 언행과 결정들은 정당했던가? 반복된 물음과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갖다 보면 막다른 골목 에서 참 자기와 만나게 되는 기회가 온다. 가짜 나에게 속아서 살아온 수많은 나날, 마음은 개운하고 세상이 밝고 평화스러움으로 느껴진다. 

그때의 에너지는 절대적인 상황에서 발현되는 무가지보(無價之寶)가 된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으로 나타나는 참 생명의 광명이다. 불안을 안정으로, 탐욕을 절제로 교만을 하심으로 유도하여 그야말로 전 인류가 화합하여 평화스럽게 살기를 희망하는 그 속셈이 코로나가 이 땅에 나타난 참 목적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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