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가 도착했다. 부리나케 상자를 뜯고 휴대폰 기기를 꺼냈다. 경찰로부터 되돌려 받은 심카드를 끼워 넣는데 온몸의 신경세포에 불이 붙은 것 같다.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난자캠 어플의 암호를 풀고 비밀 앨범을 열었다. 동영상(1)의 소년과 아테나를 보는데 심장이 미칠 듯이 방망이질 친다. 동영상(2)를 보다가 내 심장이 멎어버리면 어쩌지. 제우스의 영상은 열기도 전인데 오금이 저려온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앨범을 클릭했다. 
  제우스가 사라졌다. 19번째 재생해서 보고 있지만 텅 비어있다. 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궁금증만 증폭한다.
  난자캠 어플에 문제가 있단 말은 못 들었다. 인상을 찌푸리자 누군가가 바늘다발로 찢어진 상처를 쑤셔대는 것 같다. 손에 들린 휴대폰 액정엔 시퍼렇게 부어오른 내 얼굴이 나를 째려보고 있다. 우측 이마에 붉은 톱날 같은 찢어진 상처를 달고서. 에이, 끔찍하다. 
 아내의 휴대폰에 저장된 화재장면을 떠올리자 기분이 한결 달라졌다. 찍을 땐 불구경에 미쳐서 미처 몰랐는데 나중에 영상으로 보면서 고도의 예술 작품에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이 집은 윤선생이 세를 얻어주었다. 보통 걸음으로 십여 분이면 바다에 닿을 수 있는 동네다. “괴기를 자바서 산 놈을 무거먼 고마 쥐김더” 마치 그가 옆에서 지독한 ‘지방어’로 너스레를 떨고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전화라도 한 번 돌려볼까. 그렇지 않아도 아내가 수시로 징징거리며 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텐데, 안 될 말이다. 
  *
  낚시 바늘에 제우스의 머리통을 달아서 깊은 물속에 던져놓은 기분이 이럴까? 백상어가 나타나 머리통을 물어뜯어버리길 바라는 건가. 갑자기 낚싯줄을 타고 손가락 끝에 찌르르한 전류가 느껴진다. 큰 놈이 걸린 모양이다. 찌가 요동을 치지만 일어나기가 싫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고 싶지 않다. 
  잊어버리려고 이를 악물고 냉장고에다 휴대폰을 숨겨놓고 왔지만 여기까지 따라온 동영상이 내 뇌를 물고는 펄떡펄떡 뛰고 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생각을 끌어당기는 것은 그것뿐이다. 이러다 병이 날래나. 그렇지 않아도 제우스에게 얻어터지고 짓밟혀서 몸 구석구석이 아프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는데, 죽으면 어떡한담. 
  정말 큰 놈이 걸린 모양이다. 놈이 제법 당차게 줄을 당긴다. 그래, 당겨라 당겨. 놈이 펄쩍 뛰어올랐다. 제우스의 몸에 새겨진 타투처럼 용트림치는 것 같은 비늘을 가진 괴상한 물고기는 난생 처음 본다. 나는 낚싯줄을 놓아버린다. 놈은 수면위로 다시 한 번 청룡처럼 솟구치더니 손살 같이 파도를 타고 달아나고 있다. 놈이 수면에 긴 줄무늬를 남기며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도대체 안달복달하는 이유가 뭐야? 속에서 무엇인가가 터져 나오려고 복작거려 미치겠어. 그건 성인 ADHD일지도 몰라.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마음이 가라앉기는커녕 심장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  오른다. 이건 영락없이 병이다. MRI 촬영에 드러난 병만 병이라고 할 순 없다. 병이라면 고쳐야지.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만 있어도 절반은 치유가 될 것 같은데.
  나는 따갑게 무릎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전직 국어교사 실력을 발휘해서 글을 써보는 거다. 상상도 아니고 사실을 글로 쓰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비릿한 맛까지 본 오감을 살려서……. 
  서둘러 이 사람아, 지금 제우스의 동영상 사라진 걸 놓고 망설이고 있을 땐가. 소년과 아테나 동영상(1)이 엄연히 존재하고, 예술적인 화염장면, 거기다 선명한 기억까지 있잖아.
  뒹굴고 있는 조개껍데기를 집어 들고 갱지 같은 모래 바닥에 ‘나는…….’ 이라고 쓰고 나자 뇌가 지끈지끈하다. 영어공부를 하느라 뇌가 소진되어 버린 건가. 설마 그사이에 한글문장 기능이 지워진 건 아닐 테지.
  뇌가 폭파할 것 같다. 이럴게 아니라 소설가 Y에게 대필을 부탁하면 되지 않는가,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뭐? 그녀에게 내가 겪은 일을 시시콜콜 털어놓는다고, 말도 안 돼. 것보다야 AI(인공지능)가 낫겠다. 기계에 대고라면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Y든 AI든 제우스도 없는 몇 분짜리 동영상만 가지고 사건을 디테일하게 묘사해낼 수 있을까. 자칫 소설을 써버린다면. 거짓말을 쓴다고? 그럴 순 없는 일이다.  
 시놉시스를 써 주면 되지, 바보천치야. 나는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조개껍데기로 모래바닥에 한 줄을 갈겼다.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다. 
  간이 서늘할 정도로 첫 문장이 마음에 든다. 어쩐지 뭔가 술술 풀릴 것 같은 감이 온다. Y가 써 준다는 보장도 없고, 또 AI라면 GPT-3 어플부터 내장해야 하는데, 돈이 있어야 말이지. 아내는 이틀 전부터 윤선생이 소개한 어딘가에 일을 하러 나가고 있다.
 *
  정확하게 아흐레 전이다. 토요일이라 다음날 푹 쉴 요량으로 나는 늦게까지 숍에서 일을 했다. 윤선생의 회사에서 택배 온 신상품정리와 재고조사, 한 주의 매출 통계까지 내느라 꾸물댄 탓으로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아빠 곧 도착한다. ‘는 꿈 이모티컨’. 딸 아나에게 문자와 이모티컨을 전송했다. 숍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오자 뭉개진 어둠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서야 멀리 떨어진 정부서민임대 단지에 세워둔 차가 기억났다. 아침에 주차할 장소를 찾다가 주변을 몇 바퀴 돌고나서야 겨우 찾아낸 곳이었다. 
  쌀쌀한 겨울인데도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돌아다니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아나를 생각하는데 까만 머리의 동양소년이 넘어질 듯 위태위태하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 앞을 스쳐갔다. 십대들을 보자 당장 나서서 한 마디 가르치고 싶었지만 자제를 했다. 빨리 돌아가 아나와 풋볼 야간경기를 보러가야 했다. 
  딸은 여자 풋볼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외가를 닮아 신체가 우람한데다 유난히 키가 크고 거기다 운동신경까지 발달했다. 딸은 삼손을 닮은 호주의 풋볼선수들이 전투하는 것 같은 격렬한 태클 끝에 유니폼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는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관람했다. 오히려 열광하며 고함을 질러댔다. 12살 딸의 그런 모습을 보면 나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으슥한 코너를 돌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부딪치면 맞서야 한다는 긴장감에 목이 뻣뻣해 왔다. 
  나는 겨우 스포츠 숍 하나를 꾸려가며 생활 하고 있었다. 아나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알아주는 의사나 변호사로 키우는 것이 나와 아내의 꿈이고 미래이다. 아내는 딸을 위해서 한국의 교사직을 미련 없이 내던졌다. 아내의 이민 생활은 오직 딸을 따라 돌아갔다. 아나가 쉬는 시간에 다음날 과제를 엄마에게 전송하면 비상근무처럼 대기하고 있던 아내는 곧바로 인터넷 검색창을 열거나 지역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우리 가족은 한국 국적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 외에도 딸의 사고방식을 서구적으로 순치시키겠다며 아내는 집안에서도 한국어 사용을 금했다. 
  -서로 다른 언어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낳게 되거든. 
  아내는 호주의 언어학자 니컬러스 에번스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를 읽고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나와 아내의 끝없는 헌신과 야망, 노력과 희생 그리고 결심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바꿀 수 있는 것은 모두 바꾸었지만 나의 직업근성 하나만은 도무지 대책이 없다. 특히 청소년 문제와 맞닥뜨리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도 모르게 근성이 정체를 드러내곤 한다.    
  뛰다시피 걷다가 약국 앞에서 발길을 뚝 멈췄다. 그때 아침에 본 동양소년이 약국에서 터져 나온 불빛을 받으며 스케이트보드를 위태롭게 타고 내 앞을 휙 미끄러져 갔다. 하마터면 녀석의 스케이트보드에 발이 걸려 다칠 뻔했지만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뿐이었다. 다행히 액정은 무사했다. 
  숍을 열수 있었던 것은 윤선생의 덕택이었다. 그와는 강남에 있는 사립중학교에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4살 위인 그는 당시 나와 같은 과의 주임이었다. 그가 대조회를 준비하며 운동장에서 마이크를 잡는 날이면 아이들이 그를 제2외국어라고 킥킥대곤 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이민생활 8년차인 제2외국어는 여러 개의 숍을 소유하고 있으며 수입과 도매 그리고 온라인까지 광범위한 사업을 벌여가고 있다. 생물이 전공인 그의 ‘지방어’ 또한 호주에서 빠르게 역진화 되어 되고 있는 것 같다.  
  발바닥에 힘을 주자 고개가 저절로 하늘로 향했다. 나는 한 동안 망설이다가 약국의 뻑뻑한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신경안정제 종류인 넴뷰티알 한 곽을 받아 호주머니 깊숙이 집어넣고 약국 밖으로 나오자, 그새 달이 떠올라 거리의 사물들이 그림자를 길게 끌며 칙칙하게 억눌려 있었다. 나는 걸음을 점점 빨리해서 뉴잉글랜드 가로 접어들었다. 쥐구멍처럼 한 바퀴를 돌지 않고서는 꼼짝없이 갇히고 마는 엘리자베스 서킷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일찍 이민해서 자리를 잡은 윤선생이 부러웠다.     
  -헷 참, 정생, 이민 별 기 있는교. 밥묵고 살면 됨더. 잘 커는 얼라는 머할라꼬 공부하라고 억수로 조져대는교.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윤선생의 ‘지방어’를 나는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다. 능글능글하고 여유로운 그의 기질도. 재게 걸어서 자동차 가까이 다가갔다. 으스름한 대기 속에 아침에 세워둔 회색 차가 희미하게 보였다. 전신에 으스스한 한기가 돌고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섰다. 성급히 키부터 눌렀다. 잠금 장치가 해제되면서 번쩍, 하는 빛이 인도 우측의 검은 물체를 조준했다. 숨을 죽이고 그것을 응시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것은 사람이었다. 조금 전 약국 앞에서 부딪칠 뻔 했던 아시안 소년이 언제 그곳에서 온 것인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빠르게 차 안으로 들어가 휴대폰으로 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빵에다 베지마이트(Vegemite)를 발라 먹어가며 10kg의 덤벨을 들어 올리고 있는 중이라고 재잘거렸다. 그 시간에 공부나 좀 더 하지,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오려고 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아나는 이두, 삼두 근육을 만들고 어깨를 발달시킨다며 날마다 덤벨을 들어 올리는 훈련 덕에 체력이 어지간한 서양소녀들보다 우람한 편이다.  
  나는 약국에서 구입한 알약 두 개를 물 없이 들이켰다. 불안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짜증나는 아내의 잔소리를 견뎌가며 그걸 끊지 못한다. 약기운이 몸속으로 퍼져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몇 분 후 약기운이 서서히 뇌로 전달되는 느낌이 왔지만 평소와 다르게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기분이 달라진 것은 알겠는데 뭔가 흥분이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았다. 신경정신과 의사를 만나보아야 하나. 
  천천히 눈을 떴다. 달빛이 내 얼굴과 핸들 위의 두 손을 예리하게 비추는 것에 주춤 놀랐다. 급히 시동을 걸려다 말고 의자 밑에서 담배를 꺼냈다. 달맞이꽃 같은 노리끼리한 빛이 미치도록 담배 생각을 부추겼다. 집에 들어가면 담배 한 개비도 만질 수 없다. 그 전에 미리 피워야 한다는 심리 탓으로 한 번에 서너 개비를 연달아 피우는 좋지 않은 습관이 굳어버렸다.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이려다 말고 고개를 드는데, 그새 금화를 두 쪽으로 잘라놓은 것 같은 달빛이 소년의 머리통을 강하게 쏘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년을 무심하게 보았는데, 녀석이 점점 신경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소년을 응시하느라 담배에 불붙일 생각을 잊어버렸다. 
  소년의 앞에는 불이 꺼진 가로등이 그림자를 창끝처럼 세우고 소년을 지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화들짝 놀랐다. 누군가가 가로등 뒤에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차문을 벌컥 열었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 안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십대들이 어울리는 것을 보면 곧바로 내 직업정신이 작동하게 된다. 나는 가로등 그림자에 가려진 희미한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계속) 

테리사 리 소설가 
15회 재외동포 문학상 대상수상
11회 민초문학상 대상수상
소설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어제 오늘 내일>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