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란다 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 꽃의 화려한 보랏빛은 봄의 절정과 여름의 시작을 내게 알려 준다. 이번주 월요일부터 록다운 규제완화 2단계가 시작되었다. 각종 모임의 허용인원도 크게 확대 되었다. 11월부터 외국여행도 가능할듯 싶다. 참 반가운 일이다. 어떤 분은 이번 주에 각기 다른 네번의 모임을 약속했다고 들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 나도10월 첫주에 세 친구 부부와 공원에서 커피와 센드위치를 먹으며 담소했다. 그 때는 네 명까지만 동석할 수 있어 세 명씩 두 테이블로 나누어서 말이다. 며칠만 기다리면 다 함께 앉을 수 있겠지만 더 일찍 만나고 싶어 그런 옹색한 선택을 한 것이다.

오늘 아내는 몇개월만에 미용실에 다녀왔다. 새로 이사했던 딸의 집을 뒤늦게 방문했다. 이번 토요일에는 은퇴목회자 모임이 있다. 다음주는 치과  진료를 받을 예정이다. 이제 우리는 예전의 그런 익숙한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나 호주 의료협회는 완화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성급하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NSW주 안에도 접종율이 낮은 지역이 있어 지방 여행이 위험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경제활동이 다시 정상화 되기를 바라지만 세계적인 경기침체 속에 물가상승의 위기가 올 것으로 전망하는 전문가도 있다. 아마 마스크 착용, 정보무늬(QR 코드)찍기, 재택근무, 비대면 모임이나 디지털 정보의존등의 추세는 계속될 것 같다. 물론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변화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낯설게 느껴져도 이젠 더 쉽게 적응해 갈 수 있을까? 

중세시대에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오년에 걸쳐 2,500만명이 죽는 비극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 큰 재앙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종교개혁이며 르네상스와  근대과학이 시작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코로나 사태는 본질적으로 오래전 유렵의 그런 재앙과는 다르다. 그러나 지구촌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에 버금가는 충격과 고통을 주었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도 있다. 이를 통해서도 어떤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에 이를 수 있을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이미 시작되었다해도 그 형태와 실체는 훗날에야 드러날 것이다.  다만 그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아닌 전연 새로운 일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록다운 기간에 우울증이며, 부부의 갈등, 사업문제 등으로 갑절의 어려움울 겪여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병원에 가서 항암치료 등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은 부수적인 스트레스와 긴 기다림으로 힘겨운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들에 비해 나는 단조롭지만 평탄한 생활을 했다. 돌이켜 볼 때 두가지가 생각난다. 첫째는, 주로 아내와 함께 했던 사소한 기억들이다. 집안에서 아내를 돕는일, 쇼핑, 티비 시청, 루미오 게임 등이다. 부킹이 되는대로 아내와 함께 골프장에 가곤 했다. 그것은 집콕에서 벗어나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요 시간이었다. 또 가까운 킬케어나 에탈롱 해변에 가서 맨발로 걷는 것도 좋았다. 한가한 해변에, 모래장난이나 물장구를 치며 노는 아이들, 가끔은 윈드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을 보는 것만도 시원했다. 탁트인 바다와 하늘, 파도소리 등이 록다운을, 내자신을  잊어버리게 했다. 창조주의 손길이며 그 분의 현존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문득 그런 것들이 움추려든 내 감정을 만져주며 치유하는 힘이 된것 같다.

둘째, 혼자 있는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렙톱을 만지는 시간도 많았다. 그러나 오늘 내게 필요한 것,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등의 작은 질문으로 내 자신과 대회하는 시간도 좋았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니 나는 누구인가 등의 큰 질문으로 긴 침묵의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때로는 내안의 약함과 누추함, 상처를 마주하며 겸허한 자세로 무릎을 꿇기도 했다. 이처럼 부끄러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고백할 수 있는 하나의 산소망이 있다. 그것은 이 땅의 남은 여정을 마치는대로, 영원한 본향을 향해 떠나리라는 확신이다. 오직 주님 은혜로 말이다. 그런 소망과 기대 때문에, 매일 조금씩이라도 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지기를 열망한다. 록다운 기간이 갑갑하고 불편하기는 했지만, 내적으로는 유익한 성찰과 훈련의 기회가 되었다. 

우리 집의 작은 발코니인데도 로젤라 앵무새, 쿠카부라 등 여러 새들이 자주 찾아온다. 아내는 저들을 환영하며 먹이를 주고는 한다. 쿠카부라는 날고기를, 로젤라는 씨앗이나 빵부스러기며 설탕을 좋아하는 것 같다. 둘 다 아름다운 새지만, 먹는 것이며 울음 소리, 태도며 날개짓 등이 너무 대조적으로 다르다. 로젤라가 쿠카부라처럼 혹은 쿠카부라가 로젤라처럼 소리내며 움직인다고 상상해 보면 그건 얼마나 이상하고 우스꽝스럽겠는가! 

세상에는 나와 전연 다른 모습과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도 많다. 내년에는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는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 차이점들을 비교, 비판하거나 부러워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아니 어리석은 행동이다. 다른 사람들의 가치나 생활, 선택 등이 비록 이해할 수 없는 경우라도, 나는 가능한 열린 자세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되도록 힘쓸 것이다. 그래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과 비슷한 일상의 큰 틀 안에서 본향을 향해가는 내 자신의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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