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율이가 할머니 보고 싶데.”
“으응? 율이가?”
핸드폰 화면 가득 뽀얀 아가의 얼굴. 
“에구구 내 강아지 반가워라. 훌쩍 자랐네. 누굴 닮아 이렇게 잘 생겼노.”
흥분한 할매의 폭풍 수다에 반응이 없다.
“엄마 얘가 잠 잘 시간인데 아무리 자려고 애써도 잠이 안 와서 눈물이 난데.”
“세상에나 우리 왕자님이 시인이네. 표현이 너무 시적이잖아.”
“엄마, 나는 이 아이 땜에 살 수가 없어. 매사 이런 식이야. 고칠 수 없고, 구할 수 없고,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집요하게 날 괴롭히는 거야.” 
딸의 싸늘한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져 섬찟하다. 천사같이 말간 손주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할머니 보고 싶다고 불러놓고 아무 말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5년 전 율이는 쌍둥이 중 동생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딸은 늦은 나이인데다 쌍둥이를 갖게 되어 여러 가지 위험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무사히 자연분만을 성공시킨 닥터의 모습이 개선장군 같았다. 신생아실 침대에 누워있는 아가들은 마치 면봉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 작고 가여워서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산모는 피가 거꾸로 돌아 혈압이 180을 넘어 밤새도록 비상이었다. 독한 약을 투여했으므로 모유 수유를 금했다. 심장 문제가 심각하여 다시는 임신을 하면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다. 
내 딸이 죽다 살아났는데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 감사합니다” 를 주문처럼 되뇌기만 했다. 딸은 어려서부터 꿈꾸던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여 첫 작품을 개봉하고, 육아에 전념했다. 나는 작고 연약하게 태어난 아가들이 정상아가 될때까지 백방으로 갖은 노력을 다하는 딸의 모습을 멀리서 안타깝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살얼음을 디딘 나날이었다.

엄마 하나, 아빠하나. 그런데 한 번에 태어난 아이는 둘, 이란성 쌍둥이 선과 율.  그래서 선이는 늘 엄마의 반쪽만 차지하고, 율이도 항상 아빠의 반쪽만 차지할 수 있는 게 불만이었지. 차라리 일란성 쌍둥이였으면 언제나 아빠 엄마의 무릎에 안겨있는 아가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려니 하고 덤덤할 수 있지 않았을까?  타고난 운명! 엄마 아빠는 죽을힘을 다해 선, 율을 사랑 하는데 아가들은 반만 느끼나보다. 
서로 엄마 아빠를 독차지하겠다고 쌍으로 울어댄다. 전쟁터에서도 세월은 흘러 아가들의 돌잔치를 하게 되었다. 엄마 아빠의 희생과 노력으로 아이들은 살이 포동포동한 예쁜 정상아가 되어 있어서 대견스럽고 감사했다. 기진맥진해진 딸을 위해 두문불출하고 뒤늦게 딸의 산후조리에 최선을 다했다. 
“엄마가 있으니까 너무 좋다. 엄마, 호주 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될까?”  
딸이 애처로워 무려 넉 달이나 연장체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50여 년 전 내 아이 삼 남매의 산후조리를 친정엄마가 얼마나 정성껏 해주셨는지 산모가 아주 건강해졌던 생각이 난다. 나도 내 딸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마음뿐이다. 투석환자인 나는 호주 의료진의 관리하에 있어 시드니를 떠날 수 없다.
율이 문제에 대한 딸의 소견은 분리 불안인 것 같다고 한다. 신생아 때부터 모유 수유도 못하고 아기가 백일이 될 때까지 신생아 전문가가 돌보았다. 그녀가 떠난 후 입주 도우미가 돌이 되도록 율이를 데리고 잤다. 그 후 4개월간 외할머니인 내가 데리고 자다가 호주로 떠나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애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빠는 직업상 밤 촬영, 지방 출장으로 수시로 집을 비우게 되어 아이가 자다가 바스락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서 더듬는다고 한다.
딸의 한숨 소리에 애간장이 녹는다. 
“엄마, 쟤 아직도 울어.” 
딸도 우는 것 같다. 태평양 너머로 딸의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여 안타까움에 가슴만 쥐어뜯고 있었다.
“엄마, 글쎄 유치원 선생이 율이가 뭘 잘못했는지 친구에게 사과하라고 했다는 거야. 나이도 한참 어린 게 사과를 안 한다며, ‘그런 건 집에서 가르쳐야 되는 거 아닌가요?’ 라니 그의 입을 찢어놓고 싶었어.”
“에구구, 잘 참았다. 함부로 지껄이는 거 병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율이는 왜 사과 안 했대?”
“부끄러워서 그랬대.”
율이는 본래 말이 없는 아이. 뭐든지 나서서 잘 하는 선이에 비해 늘 엄마 뒤에 숨어버리던 율이다. 이제 겨우 만 네 살 아이의 수난이라니! 자유롭게 뛰어다니기 좋아하고, 읽지도 못하는 책장 계속 넘기던 율이가 기특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책을 보내주며 말했다.
“해양학 박사 동문이 특별히 어린이를 위한 해양학 동화를 출간 했기에 얼른 구입했어. 과학적인 내용을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쉽고 흥미 있게 소개하고 있어 아주 재미있더라. 율이 책 좋아하니 계속 읽어주렴.”
한참 동안이나 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별의별 얘길 다 했다. 조금은 건방지고 지나치게 깔끔한 딸이 평생 그런 모욕을 당하긴 처음이었을 거다. 아빠 엄마의 황금기에 태어나 강남 한복판에서 부러울 것 없이 살던 애라 부모 따라 이민 와서 몰락해가는 과정에서도 교회봉사를 잘 해서 칭찬이 자자했다. 청년사역에 봉사하기 위해 몇 년 동안 한국에 나가 반 지하에서 적응하며 서민들의 생활을 아름답게 애기해줘 참으로 고마웠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주변 거래하는 상인들의 칭찬에 이 어미는 안심하고 뿌듯했다. 세탁소 주인이 나에게 꽃 화분을 보여주었다. 늘 일만 하느라 꽃구경 못 하는 자기를 위해 따님이 사주었다고 고마워해 내 마음을 감동시키기도 한 딸이다. 이렇게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범을 아이들에게도 가르치고 실천하는 딸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게 어미로서 너무 안타까웠다. 

지난 5년간 음악치료, 미술치료, 놀이 치료 등 별의별 상담을 다 해보았으니 지칠 만도 하지. 외할머니의 역활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에 미안하고 괴로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밤새도록 울며 기도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하얀 옷자락을 끌면서 누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는 형상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예수님이 우리 율이를 품 안에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예수님이 찾고 있는 게 율이 엄마라는 걸 직감으로 알았다. 이튿날 아침 딸에게 전화로 울면서 얘기해 주었다.  
“예수님께서 널 찾으시더라. 우리 율이를 품어주시니 이젠 네 힘으로 하려고 애쓰지 말고 주님께 맡기자. 아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우리 대장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자.”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 나를 돕는 구원이 어디서 오나.      
이제로부터 영원 무궁히 주 나를 지켜주시리’

<작가소개>
박조향 선생은 국전에서 수상을 비롯 수 차례 전시회를 개최한 응용미술가로 평생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살아온 진정한 예술가이다. 자신의 삽화를 곁들인 수필집 <라일락향기>를 출간했으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성서와 문학, 좋은 수필에 수필을 기고했으며 시드니 문학, 한호 일보, 한국신문 등에 수 차례 수필을 연재 기고한 재원이기도 하다. 현재 워이워이에서 예술활동을 하며 행복한 노후를 그림처럼 즐기는 선생의 다음 예술작품을 목하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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