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토라에 ‘좋지 않다’는 부정적인 표현이 두번 등장하는데, 한 번은 창세기 초반에 남자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lo tov)..(창세기2:18)이고, 두번 째는 모세의 장인이 사위 모세에게 “자네가 하고 있는 것이 좋지 않다(출애굽기 18:17)”하고 사위에게 리더십의 이양과 나눔을 조언하는 흥미로운 장면에서이다. 
탈무드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또 혼자 리드할 수 없다’는 것이 토라의 문화 인류학적인 경구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생명(Hayim)’ 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복수로 쓰이는데, ‘삶은 필연적으로 나누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과연 토라는 리더들에게 ‘나누라’는 이 명제를 통해, 법을 내세워 통치의 근간으로 삼은 모세의 리더십에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법과 정의

1. 문제의 원인

독일의 19세기의 학자인 랍비 네찌브(베를린의 나프탈리 쯔비 예후다)는 이 장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 놓고 있다. 그는 이드로가 사위 모세를 도왔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은 모세는 수 많은 일을 했고, 지치고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만약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네가 위임하라는 말이 과연 모든 백성의 처소에 평화가 임하게 할 것인가”하는 모세의 마지막 질문은 그가 아직도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랍비 네찌브는  “그 때는 사람들이 지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 자신이 지친 것’이라고 상황의 객관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 말은 위임의 문제는 백성으로 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 자신이 문제의 원인이라는 것을 꼬집어 적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백성들에게 이런 위임구조가 취득될 수 있겠는가 이다. 이에 대해 랍비는 ‘백성들은 아마도 이미 그런 풍문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을 것이고 실제 어떻게 시행될 수 있을지에 궁금해 했을 것이다’라고 진단한다. 이는, 이미 백성들이 모세 자신이 문제의 열쇠를 쥐고 과연 그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눈여겨 관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마치 현대의 국민들이 대통령이 어떻게 위기와 문제에 어떤 해법을 제시하는지 주시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상기 시킨다.   

모세에 대한 장인 이드로의 조언

랍비 네찌브는 탈무드의 격언을 인용하여, 현자들이 ‘Bitzua’ 라고 부르는 ‘타협’ 이라는 단어로 발전한 것을 설명한다. 이것이 현대의 민사 사건에서 법 자체의 엄격함을 주장하기 보다 방안을 제시해서 형평성을 유지하며 사건을 판결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완전 ‘중재’에는 채 이르지 않은 의미로, 분쟁 당사자들이 과거의 법규나 판례에 의존하기 보다 서로 공정하고 맞다고 생각되면 서로 동의 하고 해결하는 방식이다. 

모세의 판결과 위임

2. 법의 정의

탈무드의 학자들은 “ ‘타협’은, 순전하게 법적 행정에 치우쳐서 한쪽이 승리하고 또 한 쪽은 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른 관점에서, 분쟁으로부터 얻는 것이 있는 해결 방안에 더욱 중점을 두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또는 적용하는게 맞나하는 질문과 함께 다른 논쟁적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다.

랍비 엘리에젤 같은 지도자는 모세의 모토처럼, “ 법 안에 ‘타협’은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법이 산을 꿰뚫도록 해야한다”고 강하게 주장 했다. 한편 아론은 ‘평화’를 추구하고 백성들 사이에도 평화가 임하도록 애썼다.  R. 예후다 벤 코르하는 “스가랴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재’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진실하게 법을 집행하고 평화가 문턱에 당도하게 하라 (스가랴8:16)”고 인용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법을 제대로 집행하면 평화가 보장되지 않고, 평화를 쫓다보면 법의 정의가 훼손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의와 평화가 동시에 공존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중재’가 바로 그에 대한 발전된 해답이라고 탈무드는 제시하고 있다. 

70인의 장로를 세우는 모세

3. ‘위임’과 ‘중재’

탈무드는 만약 재판장이 판결을 위한 조사와 이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선고를 한다면 그것은 자신 위주의 지나친 판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네찌브는 이에대해 공정한 판결이 되기 위해 그 시대에, 지도자 모세는 타협하지 않고 공정이 평화가 된다고 밀어 붙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던 그는 아마도, 선견적인 능력으로 이미 누가 옳고 그른지를 곧장 예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모세 장인 이드로의 판결에 대한 조언이 제시되고, 분쟁 양쪽에 평화의 문제가 대두 되었을 때, 직관력이 뛰어나지 않은 보통의 사람을 판결에 ‘중재’를 위한 사람을 앉히는 ‘위임’의 지혜로 판결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탈무드는 진단한다. 보통의 사람은 모세가 가진 법과 정의에 대한 직관적 지식은 부족 하지만, 분쟁 당사자들 모두에게 ‘중재’를 통해 양쪽 모두에게 공정을 기반으로 한 평화를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율법을 선포하는 모세

중재자는 선지자나 해방자나 법의 제정자가 아니지만 조금도 그에 못지 않은 필수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모든 제사장이 선자지가 아니 듯, 왕이라고 모두 성자가 아니고, 군대의 장군이 평화적일 수 만은 없는 것과 같다. 탈무드는 위임은 보편의 능력 안에 특별한 ‘중재’의 기능이 공정과 평화를 제공하는 해법을 탄생시켰고, 사람은 가족과 커뮤니티와 사회 속에서 함께 얽혀 살아가는 복잡한 관계성 안에 누구나 자신의 독특한 역할이 있음을 조명한다.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말고 멸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느 한 사람도 시간과 존재의 공간에 결핍을 가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탈무드는 공정과 평화를 위해, 혼자 모든 것을 하려는 것이 ‘좋지 않다’는 토라의 지침 속에 ‘위임’과 ‘중재’의 지혜를 배우게 한다. 샬롬!     

십계명과 모세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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