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각자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끔 정한 목표와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도 합니다. 출발했던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뿌리가 겸손인 섬김은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섬김은 낮게 살고자 스스로 마음먹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원하는 데로 살아갑니다.‘자유’와 ‘원의’가 서로 충돌할 때도 있습니다. 상대가 추구하는 원의가 내 자유와 충돌하면 존엄성과 인간관계가 훼손 됩니다. 하지만 타자의 원의를 동의와 함께 수용하면 그것은 나의 원의가 됩니다. 통하고 서로 받아들이는 원리가 섬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것이 섬기는 노력이 됩니다. 섬김은 상대를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섬기면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어떤 기대가 없습니다. 기대는 내 안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아(ego)가 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무런 기대나 요구를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여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기독교가 에로스를 독살하였지만 완전히 죽지 않고 더 악한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고 주장하며 기독교를 노예, 종의 종교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종교의 본질 아가페 사랑을 살지 못한 교회의 모습과 실천에 대한 비판입니다. 섬기면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됩니다. 섬기면 기대는 없습니다.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10,37)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 못한다.”(마르10,38) 섬기는 사람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태중에서부터 섬기고 평생 섬기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돌아온 길 잃은 양을 미워하지 않도록 해 보세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보다 아흔아홉를 챙겨 버티는 것이 이익입니다. 하지만 집을 나가 헤매는 양까지 찾는 뜻은 한 마리가 소중하고, 그래야 양의 무리, 공동체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아들’은 ‘자비로운 아버지’를 소개합니다. 자비는 자기 몫을 챙겨 가출한 아들이 돌아올 걸 믿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마음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 집에는 가출이란 없습니다. 아버지께는 단지 아들의 외출만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관계를 더욱 심화합니다. 잃은 양도 백성 가운데 한 멤버로 인도되기를 원합니다. 비록 실수하고 잘못을 해 완전하지 않은 양들이라도 착한 목자에게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누구도 결코 다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과 제자 열둘이 21억 양떼의 기독교가 된 힘을 잃은 한 마리 양을 다시 껴안은 따뜻한 자비심(慈悲心), 온유한 섬김이지요. 그래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참 목자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희생됩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많은 기대와 원의를 품고 있는 큰 아들은 생각이 다릅니다(루카 15장). 죄를 지었지만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동생을 미워합니다. 그 미움의 뿌리는 어디일까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유아기와 아동기 때 미움을 품게 한 상처나 두려움이었을까요? 아니면 태교 때 그 미움의 씨가 뿌려졌을까요? 분명한 것은 원인이 다양하고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과거의 내 삶에 기록된 상처나 불안을 일으켰던 인간의 역사를 지우고 다시 쓸 수는 없지만, 내 삶을 다시 이해하며 읽어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인생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하지요. 아마도 프로이드(Freud)의 작업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존중하더라도 거기에 매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과거는 치유해야하고, 현재에 머물며, 미래는 긍정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복음은 마치 몸을 튼튼히 하는 보약과 같다면, 프로이드는 하느님의 사랑인 씨앗을 잘 심고 파종하는 밭인 나 자신을 잘 일구는 데 공헌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상처가 될 마음 밭 속의 돌도 골라내고, 아프게 하는 병도 치유하고, 기억이 나지 않는 복잡한 무의식에 남아 있는 집착, 애착, 상실, 불안, 애도 등 나를 알지 못하게 한 많은 장애들을 극복할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는 본디 모두 좋은 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으로 잘 살아갈 수 있다면, 전혀 내게 잠재된 문제는 정말 문제가 되지 않지요. 하지만 자신과 다른 이가 감당할 수 없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면, 복음의 가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도움을 받아보는데 주저하지 마세요. 그래야 우리도 돌아온 길에 잃은 양을 미워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움에서 용서, 사랑, 봉사, 섬김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양들은 길을 잘 잃습니다. 작은 몸과 짧은 보폭이라 아직은 온전하지 않아 그런가봅니다.

곽승룡 비오 신부 (시드니대교구 한인성당 주임 신부)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