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경, 록다운이 강화되어 출입통제를 많이 받을 때였다. 이참에 평소 생각해왔던 토굴을 하나 지어보려고 마음을 내었다. 땅을 파고 돌을 뽑아내다 보니 마치 거북처럼 생긴 납작한 바위가 나타났다. 물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뒤따라 일어났고 그러다 보니 연꽃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연쇄적 반응으로 이어졌다. 생각의 길을 따라가다보니 자라 목처럼 생긴 돌 앞에 백련이 자리하게 되었다. 화분이 작다보니 한눈을 팔면 물이 잦아들고, 밤새 소낙비라도 한줄기 내리면 연한 잎에 흙이 튀어서 생장에 장애가 생길까봐 틈만나면 그곳에 들러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그와 더불어 올여름엔 잦은 비로 인해서 연잎이 생기있게 자라나더니, 얼마 전엔 2개의 꽃봉오리가 생기고 이젠 하얀 연꽃 두 송이가 피어서 돌거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듯하다. 이때부터 이른 아침 제일 먼저 마주하는 것이 백련화다. 꽃을 바라보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즐거움과 함께 미소를 번지게 한다. 씨앗을 맺기 이전, 벌과 나비를 부르기 위한 아름다운 분단장과 함께 거기에 걸맞은 독특함의 향기를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연꽃은 왕 중의 왕이다.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2009년 함안 성산산성 터에서 발견된 연꽃 씨를 함안박물관과 농업기술센터에서 발아에 성공해 꽃을 피우게 되었는데 700년 전의 고려 때 연꽃 씨앗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 연꽃 이름을 ‘아라 홍련’이라고 부른단다. 

또 동의보감에 의하면 연꽃에는 납 등의 독성을 제거하는 좋은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나타나 있다. 그 다음으로 처염상정(處染常淨)의 고결함이 깃들어 있다. 시궁창과 비슷한 더러운 곳에서도 전혀 물들지 않고 꼿꼿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꽃을 피워내니 그 얼마나 가상스러운가? 

요즘 한국에선 진흙탕 선거전이 한창이다. 진흙 속엔 미꾸라지가 많이 살고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 가을 논 근처에 가보면 벼를 베기 직전에 물 빠짐을 돕기 위해서 물고랑을 내다보면 배가 볼록하고 불그스름한 미꾸라지들이 펄떡거리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진흙탕 속에서 살아보려고 펄떡거리면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또 미꾸라지는 재주가 매우 좋다.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고 나면, 학교 앞마당에 큼지막한 미꾸라지들이 여기저기 떨어져서는, 햇볕이 나게 되면 이리저리 뒹구는 모습도 가끔 보았다. 그땐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큰비가 갑자기 내리게 되면 미꾸라지들이 굵은 빗줄기를 타고 올라오다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후부터 유심히 살펴 보았더니 그게 사실이었다. 진흙탕 속에서 살아서 그런지 미꾸라지에 대한 이미지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추어탕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처럼 진흙탕 선거전이라 그런지 이 과정에서 나와지는 결과에 대한 후유증을 걱정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묘안은 있다. 논 주인의 영농계획에 따라서 양자 중 택일을 잘하면 되는 것이다. 미꾸라지를 키울 것인가? 연꽃을 기를 것인가? 선택의 권한과 함께 따르는 책임의 무게, 이 모두가 주인의 몫일 뿐이다. 

사람들은 선거전의 혼탁함을 보고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곰곰이 생각하고, 지난 역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세상은 거기서 거기다. 의식주와 함께 생존 경쟁이 없어지지 않는 한, 다툼의 방법은 달라도 그 내용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현(聖賢)들이 출현해 “차별을 평등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을 갖추어서, 시비와 증오심을 소멸시켜서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보자”고 고구정녕(苦口丁寧)하게 말씀하지만 도리어 종교 인구가 줄고 있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고 하니 얼떨떨해진다. 

미래 세계는 모두가 종교인처럼 살게 되어 종교가 필요 없게 될는지, 아니면 그 모두가 무신론자가 되어 원시인들처럼 무지막지하게 살게 되는 구석기 시대가 재현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되는 세계를 목격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면 좋으련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 그저 청산을 바라보며 혼자 미소를 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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