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내에서는 물 폭탄, 우크라이나에는 불 폭탄. 이곳 저곳에서 죽음의 소식이 들려온다. 더하여 한국에서는 이어령 선생이 암으로, 뉴욕에 가 있던 ‘넥슨’의 김정주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자는 타의 추종을 불가하는 최고의 석학이셨고, 후자는 온라인 게임 분야를 개척하여 한국의 3번째 거부가 된 분이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지난 코비드 2년 동안 그래왔는데, 여전히 그렇다. 창문을 통해 드세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새삼 ‘죽음을 생각한다(메멘토 모리)’. 이 말의 기원은 로마제국. 개선장군의 행렬 뒤로 가장 비천한 노예가 따라가며 외치는 말이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히 살아라”.

죽음이 어둠이라면, 삶은 빛이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빛난다. 죽음과 삶은 한 통속이란 말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탄생과 죽음인데, 탄생은 기원을 안다. 나의 부모님이 그 기원이며, 그 위로는 가문의 뿌리가 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탄생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거대한 족보를 부인하지 못한다. 죽음 이후에도 뭔가 있다.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지성적 증거를 내놓지 못할 뿐이다. 모른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기껏해야 백 년 전후의 짧은 인생을 살면서, 죽음 이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만이다. 죽음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지성이 전부가 아니다.

2.

공광규 시인은 자신이 어떻게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는지를 ‘담장을 허물다’란 시에 담았다.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 눈이 시원해졌다 /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 하루 낮에는 노루가 /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 공시가격 구백만 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홁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삶과 죽음의 담장을 허물 수만 있다면, 나는 영원한 존재가 된다. 사실 죽음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턱이다. 대부분 집의 문턱은 높다. 무심하게 들어가다간 걸려 넘어진다. 그러나 안락한 노후를 염두에 둔 집을 지을 때는 다르다. 정교한 문틀을 바닥에 집어넣어 문턱을 없애 버린다. 문은 여전히 존재하고 열고 닫을 수도 있지만, 들고 날기가 아주 수월해진다. 한 손가락으로 슬쩍 밀어만주면 스르르 열리고 닫힌다. 삶과 죽음 사이도 그렇게 스르르 넘나 들 수 있다. 문제는 문턱이다. 내 인생의 문턱은 ‘닫힌 사고’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는 ‘오만’이다. 고상한 말로 하면 ‘지성(知性)’이다. 

이어령 선생은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知性人)이셨다. 그러나 그 분은 앞서 암으로 죽은 딸의 영성(靈性)을 가지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땅의 것에 매달려 살았던 ‘지성인(地性人)’이었다고 겸손해했다. 결국 ‘지상에서 영원으로’ 스르르 넘나들려면 땅의 것을 많이 내려놔야 한다. ‘죽음 이후’의 세상은 죽어야만 가는 곳이 아니다. 살아 생전에도 욕심을 비우면 된다. 

3.

전쟁은 욕심의 산물이다. 세상 것의 99%를 가진 상위 1%가, 욕심의 갈증에 사로잡혀 저지르는 범죄행위다. 자신의 탐욕을 애국과 정의실현이라는 포장지로 덮어 씌운다. 자국민을 선동하여 타국민을 죽인다. 그러면서 자국민도 죽게 만든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략전을 통해 양측 모두 수천 명이 죽고 있다. 죽지 않아도 될 죽음들이다. 

이제 지난 30여년 동안의 평화시대는 끝났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치욕적인 철수로, 더 이상 세계 제1의 패권국이기를 포기한 미국의 자리를, 러시아와 중국이 넘보고 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과 일본은 다시 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앞에는 새로운 불확실성 시대가 열리고 있다. 국내의 물폭탄도 심각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불폭탄에도 예민한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다. 거세게 내리는 밖의 비를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는 우리에게도, 갑자기 창문이 사라지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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