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하는 유대인
귀환하는 유대인

이스라엘이 1948년 다시 건국된 이래로, 수 천년 역사 가운데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속속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있다. 평생 살던 곳을 떠나 역이민을 하는 숫자가 늘고 있고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민간과 협조해서 정착촌을 곳곳에 세우고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와 중국, 심지어, 구 소련 지역인  우크라이나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난민 자격으로 귀환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어느 나라이던 돌아오는 자국민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국가의 책임이라 할 수 있는데, 탈무드는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야하는 특별한 이유를 토라로부터 명시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
바벨론 포로

1. 땅을 더럽힌 결과

흔히 크리스천이나 이슬람이 개종을 하거나 세상을 정복해서 한 종교를 믿어야 한다는 이유로 땅을 차지해야 한다면, 유대교가 땅을 차지 해야하는 이유를 중세의 지성인 나흐마니데스는 다소 의외인 레위기에서 그의 설명의 출발점을 찾고 있다. 

 “ (레 18:27) 너희가 전에 있던 그 땅 주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레 18: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 말은 땅을 더럽히면 그 땅에서 너희를 쫓아 낼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시기와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이스라엘에서 더 살지 못하고 떠나게 된 것에는 땅을 부패하게 만든 죄가로 인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듯 땅도 안식을 수행해야 했는데, 안식을 통한 회복과 성결의 계명을 성실히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의 결과인 것을 나흐모니데스는 상기 시킨다. 

그래서 랍비들은 경전(Sifre)에서, “ 너희는 땅을 소유하고 거기에 살며, 모든 규례를 지켜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 이스라엘 땅에서 사는 것이 토라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만큼 동일하게 중요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나흐마니데스는 심지어 “ 땅을 떠나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방 땅에는 별이나, 천사나, 천체의 권세를 중간 매개체로 대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것에 대해 유대인들의 다른 반론제기를 소개하겠지만, 이스라엘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계명을 어겨 땅을 더럽히는 것에 대해서는 피할 수 없는 혹독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각인시키고 있다. 

아브라함과 소돔과 고모라
아브라함과 소돔과 고모라

2. 땅에서 축출

토라는 첫 책인 창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나고 그들의 첫 아들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 사건으로 살던 곳에서 쫓겨나 땅을 유리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노아의 때에는 사람들이 더럽힌 땅을 홍수로 씻어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계획했지만 인간은 다시 높아지려고 하늘에 까지 다다르려고 바벨을 쌓자 그들을 다시금 한 곳에서 살지 못하도록 흩어버렸다. 

하지만 탈무드는, 노아의 시대에 의로운 개인들이 자신들을 구원할 수는 있었지만 사회 전체를 구해 내지 못한 것을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정의 구현을 위해, 드디어 한 가정을 불러내는데, 그들이 아브라함의 가족들이라고 지적한다.  탈무드는 아브라함의 중요성은 하나님이 사회 전반에 대한 정의와 공의가 구현되는 꿈을 실현하는 인물로 삼았고, 이 때로부터 유대인들은 세상 속에 모양과 질감에 있어 롤 모델이 되고, 가난하고 유약한 자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동일한 존엄성과, 법의 규정과 복지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하나님의 의도임을 부각시킨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4000여년 동안 세계 곳곳을 지나며 이스라엘 민족이 축복과 또한 숱한 핍박을 받았지만, 오직 한 곳, 이스라엘에서 비로소 사회적, 문화적, 민족적 정서와 토라로 비롯된 정의와 공의의 공동체적 윤곽이 확연해 지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비록 수많은 적들과 제국들에 둘려 쌓여 있지만, 이스라엘에서의 유대교는 사회 모든 곳에서 일체감을 갖게하고 학교와 회당과 집과 공동체가 함께 신앙과 개인의 영혼의 드라마가 쓰여지는 곳이라고 랍비들은 강조한다. 

바벨
바벨

3. ‘리허설’로서의 계명

현자들은 나흐마니데스가 한 말을 빌어 “ 누구든 이스라엘 밖에 살게 되면, 너희 스스로 구별되게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이는 고대 유대인 남편들이 잘못을 저지른 부인을 처가로 내쫓으면서 “나중에 돌아왔을 때, 새로운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도록 그 집에서도 내내 집례 규정을 지키야 한다” 말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그 시대의 여성들에게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페미니즘 위배 규정들이다. 또 다른 하나의 미드라쉬는 에스겔서 “20:32,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경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못박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 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지켜야하는 리허설과 같다고 설명한다. 

노아의 방주
노아의 방주

이에 대해 탈무드는 바벨론 포로로 간 유대인들이 “만약 주인이 종을 팔아 넘겼다면, 더 이상 종에 대한 권한이 없는 것 아니냐”며, 선지자  에스겔에게 항변했다고 한다. 참으로 법에 민감한 유대인다운 발상이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스라엘이 땅과 주권을 상실한 이상 더 이상 백성이 토라의 법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그들의 생각에 동조했다. 왜냐하면, 유대 백성은 더 이상 그 이스라엘 땅이 없고, 사람들은 흩어졌고, 유대왕이 아닌 이방왕의 통치를 받고 더 이상 그는 그들의 운명의 주권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랍비들은 레위기26:44에 비록 너희가 원수들의 땅에 있지만, 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결혼에 비유하며 “이혼은 없을 것”이며, 랍비들은 “포로로 잡혀 갈 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도 함께 따라 갔고 다시 그의 땅으로 돌아와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할 것”임을 상기시켰다. 시온주의의 긴 역사와 뿌리가 토라로부터 감지되는 부분이다.  랍비들은 다음 구절이 그들의 떠돌이 삶동안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보여주는 변함없는 그들의 역할 임을 역설한다.     

“이 모든 것을 잘 준수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지혜와 지식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명성을 떨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 모든 법에 대해서 듣고 과연 이스라엘 백성은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민족이구나! 하고 감탄할 것입니다(신명기4:6).”

‘과연 그렇기도 하네’ 하고 수긍을 유발하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땅에 다시금 하나님의 언약과 영광이 임재할 할 것을 신뢰하는 토라의 정신은 흩어진 수많은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변환의 동력이 되고 있다고 하겠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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