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아직 4분이 1이 지나가지 않았지만 연초부터 큰 이슈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2년 이상 지속되는 코로나 팬데믹 여파, 국제적 공급망 위기와 물가 앙등,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세계 전쟁 위협, 호주 퀸즐랜드 동남부와 NSW 북부 전례없는 최악의 홍수 피해 등..

호주에서는 2019-20년 여름 산불 위기(대화재)부터 작년과 올해 3월의 홍수 대란으로 3년 연속 거센 자연재난이 닥쳤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산불보다 홍수가 기후변화와 연관성이 크며 매년 반복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수만채의 가옥이 파손되면서 수재민들에게 막대한 물적, 정신적 피해를 주었다. 향후 홍수 위험 지역은 보험가입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올 정도다.     

스콧 모리슨 총리는 지난 산불 위기에 이어 올해도 재난대응에서 구설수에 올랐다. 3년 전 국가 위기 상황의 산불 대란 중 몰래 하와이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가 호된 질책을 받고 귀국한 해프닝은 그의 재임 기간 중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재난 선포 대응이 너무 늦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 재난 지원도 정치적인 고려를 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이에 항의하며 NSW의 자유당 소속 상원의원(캐서린 쿠삭)은 “실망감 때문에 사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모리슨 총리는 올해 홍수 대응 속도와 관련해 물질적 자원의 한계를 지적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의 핵심 역할은 왜 우리가 실패했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함께하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최근(3월 15일) 3주년을 맞은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처지 모스크 대학살 테러(Christchurch massacre) 발생 당시 제신다 아던(Jacinda Ardern) 뉴질랜드 총리의 대응은 정치 지도자의 위기 대처에서 ‘롤모델’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는 무슬림 여성 복장을 하고 피해 커뮤니티 곁에 오래 머무르며 피해자들을 위로하며 함께했다. 이런 피해자 위주의 슬픔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의식(sense of shared grief and shared identity)이야말로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가 보여주여야 할 ‘리더십 모델’인 셈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떠나지 않고 러시아 침공에 맞서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수도를 지키면서 비디오로 국민들과 세계에 “우리가 여기에 있다. 우리 군인들, 시민들, 우리 모두 여기에 있다. 우리는 끝까지 저항하며 싸울 것“이란 메시지를 전달해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지도자의 사례는 ‘Being one of us(우리, 피해자의 일원이 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지도자가 우리를 대변한다고 믿을수록 신뢰감이 커지고 그를 따르려는 경향이 커지는 것이다.  

그런 반면 모리슨 총리의 위기 리더십은 아쉽게도 부정적이다. 상당수 호주인들에게 “아마도 그는 우리와 함께하지 않을 것”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와이 가족 여행에 대한 비난과 관련, 모리슨 총리는 당시 행동을 방어하면서 억울하다는 뉘앙스로 ‘내가 호스를 들지 않는다(I don’t hold a hose)‘라고 말했다. ‘내가 직접 산불을 끄러 나서지 않는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와이에서 귀국한 모리슨 총리가 산불 진화 대원들을 격려하러 NSW 사우스 코스트를 방문했을 때 한 자원봉사 소방대원(중노년 남성)이 총리의 악수 손길을 거부해 화제를 모았다. 이 장면에서 본 것처럼 상당수 국민들은 모리슨 총리의 ‘지나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아던 총리가 크라이스트처치 테러 현장에서 환자 운반용 들것을 들지 않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이 키이우에서 로켓 발사기를 들지 않았다. 호주 국민 누구도 모리슨 총리가 산불 진화용 호수를 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뉴질랜드와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두 지도자들이 그런 행위를 한 것과 같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우리의 일부’라는 동지 의식과 공감대, 진정성이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힘이다. 모리슨 총리에게는 그런 면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그동안 보여진 모리슨 총리의 동지 의식은 정치 및 종교적 지향성이 같은 계층을 위한 ‘매우 편협한 울타리 만들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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