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비가 잦은 올여름이다. 더위는 잊고 잘 지나갔으나, 집집마다 물난리를 치르다가 어느덧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 좀 멎을 때가 되었건만, 오늘도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금세 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런 때엔 묻혀 있던 지난 세월의 옛이야기가 빗물처럼 쏟아진다. 

80년대 초, 통도사 서운암에서 지낼 때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해서 산언덕배기에 고물 정자를 하나 지었다. 이름이 정자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까치집 수준이었다. 주변에 오래된 고목이 많아서 그걸 기둥으로 삼고, 헌 나무토막을 받치고 이어서 힘을 받게 하였다. 앉을 곳은 대나무를 엮어서 꺼지지 않을 정도로 얼기설기 잇대었다. 더위가 매우 심할 때 그곳에 올라앉아 있으면 시원하기가 말로는 이길 수가 없을 정도다. 두터운 나무 그늘에 시원한 대나무가 받쳐주는 데다가 조금 높은 곳이라 미풍이 지나가면 땀방울은 금세 멎어버린다. 그래서 신선대(神仙坮)라고 이름하였다. 그 뒤로는 사는 곳마다 원두막을 지었다.

경주 기림사 북암에 살 땐 물이 졸졸 흘러가는 냇가 주변에 작은 원두막을 짓고는 그 이름을 ‘달맞이 정자’라고 불렀다. 그 주변엔 노란 달맞이꽃들이 달만 뜨면 달과 함께 눈을 맞추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봉화 구마동 초입에선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 명당물)를 소나무 홈 대로 파서 흐르게 하고, 그곳에 소죽 먹이통처럼 길고 큰 나무 통을 구해서 물을 받았다. 그 곁에 시골 반풍수 목수가 짓다 보니 약간 기울어지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취선당(醉仙堂)이라 명명(命名)하였다. 술 취한 신선이란 뜻이다. 

그 뒤 호주에서 살다가 6년 정도 다시 한국에서 살게 됨에 또다시 구마동 깊은 계곡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땐 고목 돌배나무와 복숭아나무들이 즐비한 냇가 곁에 원두막을 또 하나 짓고는 도리천(桃梨天)이라고 이름하였다. 복숭아꽃은 붉고 배꽃은 희며 봄풀은 푸르더라고 한 자연을 상징하는 뜻의 이름이다. 

그 뒤 물난리로 인해서 축서사 북암에서 일 년 남짓 지내게 되었는데 그곳에도 역시 6각 정자를 짓고는 토각정(兎角亭)이라고 하였다. 토끼 뿔이라는 의미로 시력이 온전하지 못한 이가 토끼 귀를 뿔로 잘못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바르게 보지 못하고 왜곡되게 인식하는 중생심을 빗댄 뜻이다. 

그 후 다시 시드니로 되돌아와서 사찰 한편에 있는 릴리필리 나무를 의지해 8각 정자를 짓고는 6화정이라고 써서 붙였다. 서로서로 화합해서 잘 살아보자는 뜻이다. 

3년 전 이곳 블루마운틴 근처 우드포드에 살게 되면서 지난날 정자 생각이 또 불쑥 치밀어 올랐다. 비가 오는 와중에 틈틈이 조립식 정자를 만들어 세웠다. 4각이라 그리 멋스럽진 않아도 그만하면 내 분수엔 흡족하다. 가제보(Gazebo)라 불리어진다는 이곳에도 이름을 하나 지어 달아야겠다고 생각한 끝에 상락정(常樂亭)이라고 하기로 했다. 이곳에 앉아서 푸른 산을 바라보면서 새들의 사랑 노래를 엿들을 수 있는 재미도 상당하거니와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하는 뜻이 그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처럼 내가 사는 곳마다 원두막을 짓는 것을 보면 아마 전생에 수박농사를 많이 지었던 업습(業習)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래전 우리 마을 근처에 새터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었다. 지금은 안동댐으로 인해서 수몰되어 물결만 출렁인다. 그곳에 구씨 성을 가진 노랭이라 소문난 노인이 있었는데, 해마다 수박과 참외 농사를 크게 지었다. 밭이 워낙 넓다 보니 원두막을 매우 높게 지었다. 서리하러 오는 청년들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성격이 얼마나 고약한지 어린이들이 참외를 하나 따먹다가 들키게 되면 긴대꼬바리로 머리를 툭툭 내려치면서 크게 야단을 친다. 그러고는 그 애 집에 데리고 가서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일러바쳐 또 야단을 듣게 한다. 그때는 워낙 먹거리가 부실할 때라 행여 꼬마들이 한두 개 따먹다가 들켜도 그 자리에서 주의만 주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일러 보냈다. 거의 대부분이 친척이고 서로 다 아는 사이라 어른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유독 구 노인은 별나게 꼬마들에게 야단을 쳐서 길을 가다가 만나도 인사도 하지 않는 애들이 많았다. 

어느 해 여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방학에 새터로 온 김 군이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참외 서리를 하다가 그 구 노인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김 군은 동네 친구들을 모두 끌어모았다. 그 노인네 수박 서리를 갈 참이었다. 밭 근처에 가서 바라보니 원두막에서 빨간 불이 이따금씩 반짝반짝했다. 그 노인의 담뱃불로 내가 ‘여기 있노라’라고 하는 사인인 것이다. 김 군이 살금살금 뒷밭으로 돌아가서 원두막에 올라가는 긴 사다리를 살짝 들어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다. 그러고는 우르르 수박 밭으로 몰려갔다. 여기저기서 발에 밟혀 터지는 수박 소리와 함께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노인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담뱃대로 나무를 내려치지만 사다리가 없으니 내려오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노인의 고함소리가 클수록 참외와 수박이 터지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그해 농사는 완전히 망가졌고, 이듬해에는 원두막도 구 노인도 보이질 않았다. 그처럼 인심을 크게 잃은 구 노인은 강원도로 이사를 갔다. 

그 뒤로 새터마을에선 새로운 노랫가락이 생겨났다. 보고 들을 것이 전혀 없었던 그때라 누군가가 주변에서 있었던 얘기들을 주워 모아 각설이 타령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일절부터 구절까지 지어서 사랑방에 모인 머슴들이나 모둠 길쌈을 하던 빨간 댕기 처녀들이 심심하면 그 노래를 부른다. 그중에서 위가 나빠서 소다를 많이 먹었다는 이유종이 아버지와 노랭이로 이웃 마을까지 소문이 난 구 노인도 자리를 차지했다. 

♪ 이전에 한 잔 들고 보세 이유종이 아버지는 소다 먹다 죽었단다. 구전에 한 잔 들고 보세 구 노인의 독한 마음 수박 접고 떠났다네 ♪ 

예부터 마음 씀씀이가 제일이라 하였다. 탐욕과 권세의 힘에 짓눌리어 그것의 심부름꾼이 되어 천방지축으로 나대다 보면 그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인과응보라는 불변의 법칙으로 나타나며 또한 민심과 천심으로 이어져서 천우신조로 이 세상의 중심을 잡아 나가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 우리들이 서고, 앉은 이 자리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눈여겨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마음 씀씀이를 잘 챙겨 볼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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