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요일 새벽, 열어 놨던 화장실 창문으로 차갑고 습기 찬 바람이 몰려온다. 발 돋음을 하고 내다봤다. 예보된 대로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다. 두 딸을 키운 아버지로서 소녀 ‘라니냐’를 불러다가 물어보고 싶다. “넌 도대체 우리에게 왜 이러냐”고. 

지난 주 금요일 큰 비의 전조가 있었다. 신학교 리트리트를 위해 울릉공 쪽으로 내려가고 있던 차, 해발 790미터의 블라이 전망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진한 구름이 하늘 높이 가득했지만 전망은 깨끗했다. 내려다보이는 블라이비치의 오솔길이 우리들을 유혹했다. 시간 여유가 있었기에 해변으로 내려갔다. 와! 장난이 아니었다. 5미터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 파도는 처음 봤다. 더 놀라운 것은 검은 옷으로 전신을 감싸고, 서핑보드를 가슴에 안은 건장한 사람들이, 미끈거리는 바위 해변을 걸어 파도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넋을 잃고 오랜동안 바라봤다. 마치 어벤저스들처럼 일렬로 서서. 영상을 찍어 SNS에 올리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 ‘와우, 세상에 저렇게 사는 인생도 있어요!” 5미터 높이의 파도가 그 곳에만 몰려온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간 본다이비치에도 몰아치며 수백만불의 손해를 입히고 있었다. 

그래도 비는 괜찮다.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쏟아지는 러시아발(發) 폭탄 세례의 결과는 처참하다. 멀쩡한 도시 한 복판에 떨어진다. 잘 살고 있던 사람들의 아파트 벽을 무너뜨린다. 비 바람 막아주던 외벽이 사라진 방, 뻥 뚫린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는 노인의 황망한 뒷모습에서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을 본다. 어린아이 앞에서 엄마를 욕보이고 살해하는 군인들.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수십명의 양민을 죽여 매장한다. 지난 세기 동안 수많은 전쟁 학살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대외비였다. 긴 세월이 지나간 후에야 진상이 드러났다. 그런 까닭에 세상은 착각하며 살았다. 이성과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우상향하고 있다고. 그러나 아니었다. 야만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을 알게 해 준 것이 SNS다. 러시아가 저지르는 수많은 참상들을 실시간으로 온 세상에 퍼 나르고 있다.  

2.

몇일 전, 미국 그래미상 시상식이 있었다. 팝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다. 관련분야에서 BTS가 2년 연속 후보에 올랐다. 사회자가 직접 그들의 테이블을 찾아와 정겨운 환담을 나누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봤다. 누군가는 좀 더 멀리서 그 광경을 찍어 SNS에 올렸다. 다음 공연 순서인 미국 최고의 가수 레이디가가의 모습이다. 그녀는 무대에 올라 대기하고 있었다. 사회자가 BTS를 인터뷰하는 2분 동안, BTS 7명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10살이나 젊은 아이돌들의 전성시대를 부러워하는 모습? 시상식이 끝난 후, BTS의 뷔는 레이디가가에게 먼저 가서 인사를 했고, 감동한 그녀가 벌떡 일어나 뷔를 깊게 포옹해 주는 장면이 온 세상에 생중계되었다. 한국산 문화의 대미 수출이 급진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봤다. 현재 애플TV에서 상영되고 있는 8부작 드라마 ‘파칭코’의 작품성과 흥행성도 범상치 않다. 내년 아카데미상도 기대해 볼 만하다. 

그러나 이번 그래미에서 나의 눈을 제대로 끌고 들어가 깊은 감동을 이끌어 낸 것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의 화상 연설이었다. ‘음악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폐허가 된 도시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침묵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침묵을 여러분의 음악으로 채워주십시오. 이 전쟁에 대한 진실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전해주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저희를 도와주시되, 침묵만은 말아 주십시오.” 

도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전혀 비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 전쟁의 원인이 그들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악을 행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SNS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그런 고발 영상을 보는 순간 나는 생각했다, ‘러시아는 졌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윤리적이다. 자기가 선한 행동을 해야, 이웃에게 선한 대접을 받는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극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비윤리적이 되기도 하지만, SNS로 보는 비윤리적 행동에 대해서는 십시일반으로 정의구현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호주에 사는 러시아인들도 조국을 탄핵하고 나섰다. 그래서 매우 궁금하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어떻게 결말지어질지가.

3.

다시 블라이비치의 서퍼들을 생각한다. 거대한 파도가 오히려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지형에 따른 파도길을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쯤에서 파도를 타야 큰 바다로 나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파도 앞에 선 사람들 중에는 두려움에 망설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더 큰 파도를 기다리기도 했다. 이미 늘어난 관중들은 그 사람의 뒤를 좇았다. 가볍게 파도 위에 뛰어올라 먼 바다로 나가 대기하는 그를 주목하고 있었고, 가장 높고 거센 파도를 골라 타고 들어오는 모습에 환호하며, 열심히 스마트폰에 담고 있었다. 그 영상은 바로 전 세계로 중계될 터였다. 물론 모든 서퍼들의 종착지는 해변 모래 사장이다. 파도의 도전 앞에서는 여러 모양이었지만, 결국은 다 해변에서 만났다. 

우리도 다 그러하다. 세상이 주는 험한 파도 속을 헤치고 살다가 결국 한 곳에서 만난다. 그 동안의 시간은 각각의 인생에게 주어지는 두 번 다시없는 선물이다. 그 기회를 낭비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인생의 파도가 심하게 몰아닥친다 해도, 손해를 최소한 줄이며, 오히려 즐기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두 비치를 보라. 같은 시간에 동일한 파도가 블라이비치와 본다이비치에 몰아 닥쳤다. 본다이비치는 큰 피해를 입었다. 록풀이 망가지고, 콘크리트 구조물이 쓸려 나갔다. 복구에는 1달 이상과 수백만불이 든다. 그에 비해 블라이비치는 전혀 손상이 없었다. 오히려 서핑의 명소가 되었고,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드는 성지가 되었다. 요점은 이것이다. 인공 구조물을 줄여 나가야 한다. 내가 세운 인생탑을 없애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무소유로 살라는 말은 아니다. 오늘을 살되 열심히 살라. 많이 벌고 많이 소유하라. 단, 약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벌 수 있는데까지 벌라. 그 이유는 더욱 많이 나눠 주기 위함이다. 당신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크라이나를 비롯해서, 땅을 빼앗기고 술에 찌들어 사는 원주민들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인생길에 불어 닥치는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SNS다. 네게 주어진 인생, 멋지게 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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