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특정 사건과 정세의 배경을  설명하느라 근인(近因)과 원인(遠因)이란 말을 잘 썼다. 시사와 뉴스를 먹고 사는 언론은 멀리 보다 가까운 이슈에 초점을 맞추기 쉬운데 문제의 해결을 말한다면 그런 근시안적 접근보다 문제의 깊은 뿌리를 파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원인(遠因)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여기 한인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러기에 교육효과가 큰 한국 텔레비전 이야기다. 많은 걸 못 다루고 한 가지 만이다. 그 영상 미디어는 굵은 자리들을 노려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명사(名士)들, 영어로 말하면 Who’s Who(누가 누구)의 이야기로 비싼 재원을 너무 많이 소모한다는 사실이다.

한 자리를 해야 남자

그게 오늘의 한국의 정치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며 좋겠는데 그럴 것 같지 않다. 예외가 있을 테지만 대개는 세계에서 2등가라면 서운해야 할 민족성인 직위의식의 발로이지 강한 애국심은 아니다. 몇 백년 동안을 쌓여 온 이제는 타기(唾棄)해야 할 관존민비(官尊民卑) 사상이 그 뿌리다. 

한 자리를 해야 남자라는 잘못된 인식과 사회 분위기(요즘에는 여성들도 한 자리를 하니 위 말은 고쳐야 할 지 모르겠다)를 조성하는 이 잘못된 전통과 의식구조 때문에 아직도 한국에서 좀 똑똑하다는 사람은 이를 향하여 쇠파리처럼 모여드는 것 아닌가. 

우리의 자리에 대한 투쟁은 과거 풍부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권력과 그에 따르는 월권인 특혜와 이권과 영향력에서 연유한 게 아닌가. 그런 게 없다면 왜 거기에 그렇게들 목을 매겠는가.

그렇게 모여들어 한 자리를 하고자 경합하고 경쟁을 치열하게 벌인다면 궁극적으로 최선의 인재와 지도자가  발탁될까? 다른 분야는 몰라도 정치와 사회는 아니다. 당사자와 추종자들간 시기, 모략, 중상, 꼼수, 불법이 난무하는 험악한 정치판에서 나라를 위하여 올바르게 일할 사람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도 독자, 청취자, 시청자에게 기사라는 상품을 팔아야 하는 언론은 사실상 그런 풍토 부추기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인가 흥행인가

얼마 전 끝난 시끄러웠던 대선은 참 좋은 사례였다. 누군가 하나 승자를 뽑아야 하니 어찌 할 수 없었지만 그때 우리 사회가 보여준  후진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미디어는 새 정부에 누가 요직에 발탁될 것인가, 국회청문회를 잘 통과할 것인가를 점치는 설과 설도 모자라 ‘대선 2라운드’라며 이어지는 지방 선거, 예컨대 경기도와 그 외 각 도의 도지사, 서울시장, 대구시장, 부산 시장자리를 놓고 누가 출마하느니 안하느니 보도하느라 언론은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언론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리는 건 좋다. 그러나 어느 거물들이 대거 나온다느니 빅매치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안 쓰면 안 되나? 누구 마음대로 이들이 거물인가? 또 누가 누구를 뒤에서 만나고 밀고  등의  꼼수이거나 자질구레한 가십거리는 모두 흥을 돋우어 선거판을 달구려는 것 아닌가. 그런 보도보다도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를 좀 먹는 지금과 같은 감투싸움과 사회 혼란을 지양할 수 있을까와 같은 교육적 해설에 지면과 공간을 더 할애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뭐라고 말하든 언론은 사회의 거울이다. 이런 기사가 넘친다는 사실은 분수에 넘는 자리를 탐내는 사람과 누가 그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팔자가 바뀔 사람 모두가 많다는 방증이다.

호주에도 총리, 연방의원, 6개 주와 두 테리토리(준주), 주의원, 그리고 시와 카운슬 등 지방자치의 수장 선거가 있다. 그러나 자리다툼이 우리처럼 치열하지도 않고 그 이야기가 그렇게 많이 보도되지 않는다. 이 나라에서는 총리, 장관, 주총리가 누구인지 모르는 주민도 적지 않다. 무식해서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누가 하든 잘 할 것이라든가 차이가 안 날 것이라는 생각이 아닐까. 그러니 어느 누가 어디에서 나올까 서로 저울질을 하느니, 어디 출신이 누구의 후광을 업고 나오느니 등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는 대중의 관심거리가 아니며 기사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나라가 비교적 안정적이다. 물론 이런 나의 견해는 주관적일 수 있다. 이견이 있는 독자께서는 알려주시기 바란다. 

끝으로 이 대목에서 고려시대 충신 정몽주의 모친이 아들을 위하여 썼다는 명문의 현대 버전을 아래에 남기고 싶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성난 까마귀들이 흰 빛을 보고 시기하고 미워할까 두렵다/청강에서 깨끗이 씻은 몸이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는구나/

거의 700년 전의 혼란한 시대상이 지금도 재현되고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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