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시라아의 군대에 포위를 당하고 생존의 막바지에 이르른 때의 이야기이다. 식량은 떨어지고 물가는 치솟고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자신들의 자녀를 죽여 다른 가족들을 먹이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여성들은 급기야 왕에게 나아가 도움을 청하자 왕은 국가적으로도 방법이 없고 다만 하나님만을 기대하는 초조한 상황이 되었다.   

토라의 나환자 이야기
토라의 나환자 이야기

1. 위기와 이방인

왕은 당시의 선지자인 엘리사에게 사람을 보내에 만약에 비책을 내놓지 못하면 목을 벨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엘리사는 왕의 비서관에게 내일이 되면 모든 상황이 변해 식량이 준비되고 밀가루가 싼 가격에 팔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비서관이 비웃으며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느냐고 무시하자 엘리사는 “반드시 그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것을 먹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4명의 나환자가 등장한다. 그들은 늘 성밖에서만 살아야 했고, 더욱 식량이  떨어져 이 곳이든 저 곳이든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성안에 들어가 잡혀죽던 굶어죽던 가보자며 해질 녁, 시리아 성안에 들어오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곳엔 아무도 없고 이미 시리아 군대는 모든 음식과 옷과 금과 은을 내 팽개치고 황급히 도망을 간 상태였다. 나환자들은 실컷 먹고 마시고 금과 은도 마음껏 챙길 수 있었다. 

시리아(아람) 진영으로 들어간 나환자들
시리아(아람) 진영으로 들어간 나환자들

그리고 그들은 사마리아에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제 빨리 그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밤에 그곳을 떠나 왕궁에 이를 알렸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한편 이것이 위장된 함정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그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어 곧 몇 명의 정탐꾼을 보냈다. 그리고 정탐꾼들이 돌아와 나환자들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고 보고했다. 다음 날 백성들은 시리아 성으로 달려갔고 선지자가 말한대로 밀가루가 싼 가격에 팔리고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그리고 선지자의 말을 비웃은 비서관은 그 때 성문의 수장이었지만,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고 말았다. 음식이 풍부한 것을 보았음에도 결코 먹지 못하리라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토라는 빠뜨리지 않고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고 그가 세운 선지자의 권위를 조명하는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시리아 군대가 도망간 이유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병거와 말과 거대한 군대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거대한 연합 군대가 이스라엘을 돕기위해 당도했다고 믿었고, 두려운 나머지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황급히 도망했다. 

선지자 엘리사
선지자 엘리사

2. 역사와 이방인

역사학자 스티븐 로젠버그는 이 사건이 실제 810 BCE 경 벤 하다드3세가 다스리던 때로, 아다드 니리3세 통치하의 앗시리아가 시리아를 공격하고 조공을 받았던 시기라고 추측한다.  또한 BCE 805년에 시리아의 국경에 정탐을 보냈는데, 그 때 시리아 군대가 히타이트 군대로 알고, 또 팔레스타인이 시리아가 가드를 공격한 것에 보복하느라 남서쪽으로 접근해갔던 것으로도 추측한다. 양쪽으로부터 적들이 당도한다는 것을 들은 시리아 왕이 사마리아를 황급히 버리고 그들의 국경으로 도망했을 것이라고 이 사건에 대한 역사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 토라 이야기에는 왕과 선지자와 그리고 완전한 이방인들인 4명의 나환자들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나환자들은 보잘 것없는 주변인이며 외부인이었지만, 내부자들이 결코 볼 수 없는 적나라한 진실을 볼 수 있었고, 획기적인 승리의 기쁜 소식을 알리는 주역들이 되었다. 

사마리아의 위기
사마리아의 위기

탈무드는 ‘이방인’ 의 전형적인 예는, 모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시한다. 모세는 몇배나 양쪽으로부터 외부인으로 취급되는 사람이었다. 이집트 바로의 왕궁에서 자랐고 더욱이 미디안 광야에서 제사장인 장인 이드로와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해 40여년을 이방인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이집트 사람같은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외부인이고 또한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히브리인이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웃을 위해 싸우고 기도했지만 다른 세상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수했다. 탈무드의 현자들은 히브리 사람 이란 말을 “온통 세상은 한 편이고 그는 다른 편인 사람” 이라고 묘사했다.유대인들은 흔히 자신들은 늘 “낯선 땅의 이방인”이라고 표현한다.  외부인은 때로, 변화의 중재자들이다. 내부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네 명의 나환자와 구원
네 명의 나환자와 구원

3. 시대적 역할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 가운데 늘 이방인들로 살아왔다. 잘 알려진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유대인을 크리스찬 세계에서의 부랑아로 간주했다고 보았다. 모던 시대의 유대인 지성들은 기존 사회에 대해 더욱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주류로부터 부랑아로 취급되고 기존 사회로부터 이방인이었고, 유대인으로서의 신앙과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므로 또한 주류 유대인 사회로부터도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이방인들로 떠돌아 살면서도 그들의 입지 때문에 오히려 두각을 나타내는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 그들이 특히 자부하는 네 명의 이방 유대인들이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모세 헤스, 레온 핀스커, 맥스 노도, 데오도르 헤르츨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현대 역사 속에 이름을 등장시키고 독립과 귀환을 촉발한 시온주의 운동의 시조들이다.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의 근대 정신으로 발돋움하고 이들의 건국 이념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이념의 기초는 폴란드와 벨그레이드의 주목하지 않는 시골 랍비인 Zvi Hirch Kalischer, Yehuda Alkali 두 사람이 그 이전 시대에, 시온주의의 기초가 되는 글을 작성해 둔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저 주변인이며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미래 시대를 이끄는 국가 이념의 기틀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시온주의 주창자-데오도르 헤르츨
시온주의 주창자-데오도르 헤르츨

토라는 낮고도 낮은 계층이며, 성내에 결코 발을 들일 수 조차 없던 나환자들이 굿 뉴스(Good News)를 전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 시대에 어느 누구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낼 수 없었다. 나환자 네명은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그저 생존만이 급급한 이방인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버려진 삶의 입지가 구원의 현장을 목도 할 수 있었다. 탈무드는 이방인들은 주류 사회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은 종종 세상에 기쁜 소식이 된다고 가르친다. 주변인이며 이방인같던 디아스포라 한인들이 한류로 인한 기쁜 소식의 주역들이 되게 한 현실은, 또 다른 이방인들에게 세상의 희망과 밝은 도전이 되고 있다. ‘이방인의 열전’이 시대를 거듭해 쓰여지고 있다. 샬롬!

까뮈의 이방인
까뮈의 이방인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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