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실인은 거룩함의 특별한 법을 금욕주의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않고 머리를 자르지 않으며, 죽은 시체로 자신을 부정하게 하지 않아야하는 사람이다(민6:1-21). 그런 명시는 보통 3개월내의 한정된 기간동안만 시행되곤 했는데 예외가 있었다. 유명한 삼손과 사무엘같은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기적적인 특별함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나기 전 부터 나실인의 삶으로 약정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비록 이것이 추천할 만하더라도 사람이 왜 이런 금욕적인 삶의 형태를 택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답을 하고 있지 않다. 

중세의 수도원

1. 상반된 견해

우리가 나실인에 대해 일방적으로 경건하며,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유대인들은, 한편에서는 나실인들을 하나님께 ‘거룩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한 쪽에선 그들의 경배의 삶의  마지막엔 그 역시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바쳐야하는 ‘죄인’이라고도  보았다. 탈무드의 역사 안에는 이러한 상반된 랍비들 사이의 불일치가 미쉬나시대, 탈무드와 중세 시대에도 오랫동안 지속되 온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랍비 R 일라이져와 나중에 나흐마니데스에  따르면, 나실인들은 공경받을 만하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높은 경지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선지자 아모스도 (2:11)” 내가 당신의 아들 중의 몇을 하나님께 가까운 선지자와 같은 나실인을 키웠다” 고 말했다. 한편 일부에서는,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이 나중에 죄인으로서 속죄 제물을 바쳐야 했던 것은 결국 세속의 삶으로 돌아 갔기 때문이라고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지적한다. 그들의 죄는 결국 나실인에서 떠나는 것에 있었다고 R 엘리에저 하 카퍼와 슈미엘은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신비주의 이슬람- 수피즘

‘자기 부정’이라는 단어는 한편 ‘자아성찰’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면을 내포하지만, 탈무드는 나실인이 하나님이 창조 후 ‘좋다’고 말한 세상에 담겨진 즐거움에 대해 ‘자기 부정’으로 출발한 나실인의 삶의 시작이 이미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엘리에저는 “ 와인의 즐거움, 인생의 다른 기쁨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죄인 이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한 논쟁은 내면의 확신에 관한 것이고 ‘자기 부정’의 왜곡된 이해에 관한 것이라고 탈무드는 정의 한다. 모든 종교의 거룩과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즐거움과 유혹을 멀리하는 삶을 산다. 그들은 동굴이나, 수도원, 경건한 장소를 택해 살았다. 사해 사본이 나온 쿰란 공동체도 역시 이러한 운동의 한 예라 볼 수 있다. 

경건과 수도승
경건과 수도승

2. 세상과 자기 부정

중세에 이런 ‘자기 부정’의 삶을 세상에 적용하며 살았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 지역인 이란과 하시딕 아쉬케나지로 불리는 북 유럽의 사제들이었다.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돌아보면  적어도 이러한 경향이 비 유대인 환경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랍비들은 주장한다. 십자군 시대에 왕성했던 아쉬케나지는 ‘자기 부정’을 추구하는 크리스쳔 사이에서 살았다. 또한 남방의 무슬림들도 수피즘 경향의 이슬람 신비주의를 좇았다. 그래서 아마도 ‘ 자기부정’의 삶의 방식의 영향은 아마도 외부로 부터 유대교로 들여온 것이라 진단한다. 

쿰란 공동체와 동굴
쿰란 공동체와 동굴

그리스를 중심한 서방과 이란을 주축으로 하는 동방은 실제 세상을 부패하고 타락한 곳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양성론자들로 진정한 ‘신은 우주를 창조한 신이 아니다’라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 실질적인 세상은 ‘저급한 신’이거나, ‘악’, 또는 부패한 존재의 작품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진정한 신은 세상에서는 발견될 수 없고 따라서 즐거움 보다는 세상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살아야한다고 믿었다.탈무드는 창세기에서 신이 일곱번이나 반복해서 ‘좋다’ 라고 한 세상속에 반드시 거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분이라고 강하게 믿는다. 그래서 세상의 즐거움의 가치를 폄하하기 보다 오히려 그것을 성화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별하게도 중세의 현자 마이모니데스는 이 두가지 극간을 모두 수용하였다. 나실인은 선지자로 간주 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한 극단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의미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는 두가지로 이를 조명하는데 하나는 성자(하세드)와 현자(하캄)의 삶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쿰란 동굴
쿰란 동굴

3. 탈무드의 현자 마이모니데스의 ‘성자와 현자’ 

마이모니데스는 성자를 ‘극단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한다. 성자는 분명 좋은 행동이지만 지나친 기준의 엄격한 정의를 요구한다. “ 그래서, 어떤 사람이 거침없이 극단적인 금욕을 추구하고, 지나치게 겸손하다면 그는 마땅히 성자로 불린다.” 고 말했다. 

반면에 현자는 총체적으로 다른 류의 사람이다. 그들은 금쪽 방안, 즉 중간지점을 찾는 사람이다. 즉 겸양과 균형의 길이다. 그들은 한쪽으로는 비겁한 겁쟁이의 극단을 피하고    인색하지 않지만 낭비하지도 않는  대신 관대함의 중간을 택하는 방식이다. 현자들은 과한 것과 부족한 것의 양면의 위험성을 모두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 논어의 ‘과유불급’(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는 ‘소탐 대실’(작은 욕심으로 큰 손실을 초래한다) 이라는  동양 사상을 상기 시키는 말이다. 그들은 다투는듯 한 삶의 압력과 대응에 대해 극단을 피하려 했다. 

성자는 자신의 돈을 가난한 자를 위해서 모두 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가까운 가족들은 선지자 자신의 자기 부정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만약 성자가 전장에서 전투를 거부 한다면? 그렇다면 성자의 나라와 국방은? 성자가 자신에게 죄를 범한 모든 사람을 다 용서 한다 할 지라도 국가의 법의 규칙과 사회의 정의는 ? 그래서 마이모니데스는 성자는 극단적으로 개인의 덕에 중심된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성자개인이 그런 거룩한 사회를 혼자 건설할 수는 없다. 진정, 성자는 사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외롭고 분리된 개인의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탈무드는 이에 관해 마이모니데스 만큼 분명한 지침을 내려주는 다른 어떤 철학자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

그러나 현자의 길은 이와는 다르다. 그는 완전한 사회를 원한다면 현자를 찾아야한다고 강조한다. 현자는 극단 주의자가 아니라 사회 속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멤버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그 공동체 안에 같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의 동료들이있고, 지켜야할 국가와 함께 세워야할 사회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탈무드의 ‘현자’ 들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덕을 추구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유별나게 보자면, ‘성자’의 삶은 ‘자기몰입’이라고도 불릴 수 있다. 탈무드의 정신은 ‘인간은 하나님으로 부터 이 세상에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땅으로 부터 도망하거나 도전적인 압박으로 부터 타인들을 방관하지 않고 창의적인 삶으로 균형을 이루어 가야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개별적으로는 나실인들이 ‘성자’이면서도사회적 입장에서는 삶의 마지막에 속죄 죄물을 드려야 하는  ‘죄인’이기도 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자’처럼 살기를 갈망했지만, 자기 주위의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없었다. 우리 주위에도 자신은 종교적으로 영적이고 경건하지만 가정과 사회에 대해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많은 사례들이 즐비하다. 공동체와 주변의 책임 질 사람들을 돌보며 또한 경건을 추구하는 겸양과 균형이 바로 탈무드가 찾는 ‘현자’, 마이모니데스의 가르침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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